주역에 대한 단상
주역에 대한 단상
서양의 정신분석학자인 칼 융은 주역에 대해 “주역은 자연과 같이 사람들 스스로가 발견할 때를 기다린다. 자기 자신을 알고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라고 말했다. 주역이 무엇이냐고 내게 물어보면 아직도 선뜻 대답할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십 몇 년 이상 주역공부의 귀거래처歸去來處를 찾기 위해 공들인 노력과 시간에 비추어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주역이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불현듯 주역을 공부하면서 느낀 단편적인 생각을 정리해보는 일도 또 다른 공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주역에 대한 이해가 미미한 수준에 지나지 않더라도 학역자學易者의 입장에서 내내 화두처럼 머물고 있는 의문점을 두려움 없이 펼쳐보이는 것이다. 이런 시도를 통해 주역이라는 큰 산에 들어서서 길을 헤매는 학인이거나 주역공부를 시작하는 초학자가, 주역공부의 지향점이 무엇인가를 반추해보는 계기는 될 수 있을 듯싶다.
1. 주역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줄 수 있는가?
데카르트 이전 서양을 지배하고 있었던 사유체계는 기독교 신학이었다. 신학의 모태가 된 그리스 헬레니즘 철학은 진리계와 현상계를 이분법적 대칭구조로 보는 관점으로서 세계가 순수한 진리계와 세속의 인간계로 구분된다고 보았다. 이런 사유체계의 바탕위에서 인간은 순수한 곳에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야 구원된다는 믿음의 종교가 태어났다. 어쩌면 이런 결과는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면 동양 최고의 학문인 주역에서는 천도天道, 지도地道 및 인도人道를 하나로 묶어 하늘과 땅이 행하는 길의 변화에 맞추어 인간이 걸어가야 하는 도리를 제시한다. 주역은 인간이 이성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일에 마주쳤을 때 하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출발하였다.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 사람은 점을 쳐 얻은 64괘 중 하나의 괘와 그 괘의 특정한 효사로 나타내는 하늘의 뜻을 해석하여 현실상황에서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얻는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천도의 이치를 궁구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위로는 하늘의 덕을 본받고, 삶속에서는 학문을 익히고 실천하는 길로 나아가게 된다.
신학과 주역의 관점 차이는 무엇일까. 주역은 천도, 즉 하느님의 뜻이 음양의 변화로 나타난다고 보고 괘와 상을 읽어 그 뜻을 읽어낸다. 주역 점괘의 해석에서는 천명天命과 천덕天德을 많이 언급한다. 천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태양과 달이 포함된 천체가 움직이는 원리는 과학법칙으로 기술될 수 있지만 주역에서 말하는 천도는 음양, 또는 음양오행으로 기술되는 자연변화의 법칙이다. 주역은 먼저 점괘를 뽑는 행위를 통해 천명을 묻는다. 어떤 괘에서 나타난 천명, 곧 길흉은, 점을 치는 사람의 밖에서 따로 독립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점괘는 점치는 사람과 분리될 수 없기에 언제나 점을 치는 자에게 좋은 괘일지라도 그에 맞는 덕을 갖추라고 말한다. 더욱이 점괘가 나쁘게 나오면 때를 기다리거나 덕을 기를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굳이 점이라는 수단을 통하지 않고도 늘 스스로 그 때와 위치(時·位)에 맞게 대처하고, 모든 일에 삼가는 자세를 가진다면, 그 자체가 천명에 대한 보편적 대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주역은 점치는 데서 출발했지만, 점을 칠 필요가 없는 군자가 되는 길을 제시하는 학문이라고 생각된다.
주역 계사전繫辭傳에 신神이라는 표현은 천도의 변화라는 의미와 함께 쓰인다. ‘신묘함으로 다가올 일을 알고神以知來’, ‘신은 음양과 같아 헤아리지 못한다陰陽不測之謂神’, ‘신이란 만물을 묘하게 하고서 말을 하는 자神也者 妙萬物而爲言者也’ 와 같은 말을 들 수 있다. 신은 음양의 변화작용으로 신묘한 작용이 나타나고, 늘 천도와 함께 하기에 우주의 시공간 어딘가에서 따로 거처한다고 볼 수 없다. 사람이 이러한 신의 묘용, 즉 신도神道를 깨달으면 길흉의 결과에 자신의 의지가 좌우되지 않게 된다. 이는 주역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이 신인합일神人合一 또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도달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물신주의의 팽배,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부조화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소외, 자연을 개발해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인간중심적 사고로, 사람들은 점점 더 자기를 둘러싼 타자로부터 고립되어 간다. 이 같은 소외현상에 대해 주역의 천인합일관은, 자연과 공존하고 사람과 사람, 자신과 타자와의 공생의 관계를 통해 조화를 도모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점에서 주역은 관계가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고 여겨진다.
2. 주역에서 말하는 理와 과학적 법칙
근대 서양의 과학문명이 발전하게 된 이면에는 르네상스를 기점으로 연역적인 사유방식의 체계를 수립한 것이 중요한 계기였다고 볼 수 있다. 신본주의에서 벗어나 인본주의의 길로 나아감으로써 사유의 뿌리가 그리스의 헬레니즘 사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데카르트는 천상계와 물질계를 확실히 단절하여 물질계의 이치를 밝히는 사유의 방법을 확립하였다. 데카르트가 구축하려고 하였던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진리체계는, 그대로 과학정신으로 이어져 분석적, 추론적, 환원적, 연역적 탐구라는 흐름으로 전개되었다. 데카르트는 사유의 과정에서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개념은 버리고 버렸다. 그러면서 그는 끊임없이 ‘왜’라는 물음을 통해 진리에 이를 수 있는 극한점까지 생각의 확장을 이어나갔다. 그가 최종적으로 도달한 결론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이다.
이런 사유의 토대 위에서 뉴턴은 물질세계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운동법칙을 발견하였다. 그는 물리계의 기본 운동법칙인 제1관성의 법칙, 제2가속도의 법칙, 제3작용·반작용의 법칙을 수식으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물질세계의 법칙이지만 결코 경험적으로 느낄 수 없는, 현상의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원리다.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다가 사물을 작동시키고 있는 법칙을 찾아낸 결과라 할 수 있다.
주역의 사유방법은 태극이 펼쳐낸 음양의 대대大對라는 움직임 속에서 변화의 이치를 궁구한다. 사물들 간의 관계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그치면서 다시 나아가는 변증법적 변화과정 속에 있다. 그 관계는 음양의 변화로 해석할 수 있기에, 점치는 자占者는 변화에 앞서 드러나는 미묘한 징조를 음양의 관점으로 먼저 읽어낸다. 주역을 공부하는 학인들은 형이상학적인 리理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한다. 주자는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개념을 중요시 하였다. 여기서 격물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그 지극한 곳까지 도달하는 것이고, 치지는 알고 있는 지식을 미루어 알지 못하는 영역까지 도달하는 의미다. 사물의 이치, 격물의 이치가 뉴턴과 데카르트가 찾았던 형이하학적 이치와 다른 것인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 것일까.
중력장에서 태양계에 포함된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치는 자연과학의 운동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다. 주역에서 말하는 형이상학적인 리는 무엇일까. 주역이 물질계의 운행법칙이 아닌 형이상학적 진리로만 해석 가능한 수단에 머문다면 진리의 한쪽 면만 인정하는 체계에 불과할지 모른다. 주자는 그 때까지 이룩한 과학적 지식을 흡수하여 주자학의 이론적 토대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주자가 말하는 형이상학적 리理와 현대과학의 물리법칙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주역에서 말하는 하늘의 운행도 물리적 법칙을 따라 움직일 뿐인데, 천지인天地人의 조화를 말하는 주역은 천도를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는 천지의 덕으로 해석한다. 근본적으로 천지가 운행하는 물리의 세계와 인간본성의 작동방식은 다르다. 천인합일을 주장하는 주역의 세계관은 이 차이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경험적으로는 물리를 아무리 극한으로 연구해도 밝혀지는 것은 형이하학적인 법칙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양자역학에서는 관찰자의 마음이 극미의 물리세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주역을 통해 천도, 지도와 인도, 그리고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 통합될 수 있기를 바라지만 아직은 경험적 차원을 넘어선 미지의 영역이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주역공부의 궁극적인 귀결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 주역이라는 말은 곧 역술, 역학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수천년 동안 수많은 학자들의 공력으로 이루어진 주역의 사유가 우리가 처한 현실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지금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가질 수 있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면, 주역 안에 녹아들어 있는 지혜를 어떻게 받아들여 펼칠 것인지에 대해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만일 주역의 원리가 너무 고원하다고해서 신비의 영역에 있는 것으로 바라보거나, 주역공부가 그저 성인이 되기 위한 공부라고만 인식한다면 현실과 더불어 살아 숨쉬는 학문이 아니다. 세상의 변화를 거부한 채 현실과 담을 쌓고서 초연하게 스스로 선택한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군자의 모습만을 강조하다면 결국 주역은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질지 모른다. 변화의 마땅함을 추구하는 주역이 시대와 함께할 수 없다면, 수많은 학자들로부터 몇 천 년의 기나긴 담금질을 견딘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인류의 영원한 숙제인 ‘나는 누구이며, 사람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며, 사물은 무엇이고 사물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세상은 어떻게 흘러가는지’라는 물음에 대해 주역은 그 답을 안내하는 빛으로 오랜 세월 비쳐주었다. 하지만 인공지능으로 대변되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지금껏 주역이 밝혀 온 빛은 더 이상 필요 없을지 모른다.
오랜 시절 주역이 던져주었던 빛은 보이는 것을 넘어선 신비의 세계에서 오는 빛이고 인간의 마음 깊숙이 숨어 있는 지혜의 불빛이다. 그러기에 첨단의 과학시대에도 불구하고 주역이 가진 지혜의 빛을 밝혀야 될 당위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된다.
3. 시간의 문제
현대로 접어들면서 뉴턴-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세계관이 아닌 양자역학의 법칙으로 기술할 수 있는 극미의 세계와 상대성원리로 해석되는 극대의 세계가 탐구되면서 뉴턴의 운동법칙들은 한계를 노정하게 되었다. 열역학, 양자역학, 일반상대성 원리 등이 우주의 보편적 법칙으로 제시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에 일대 전환이 일어나게 되었다. 최근 들어, 우리가 보는 세계는 인식할 수 있는 단순계가 아니라 복잡계이므로 인식 사고의 과정 자체에 한계가 내재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있다. 극미의 세계, 극대의 세계는 데카르트·뉴턴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시간-공간좌표계가 근본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무엇이 문제인가. 바로 관찰자와 시간의 문제이다. 나란 무엇이고, 시간이란 무엇인가. 나란 존재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기에 어떻게 시간을 정확히 인지할 수 있는가. 시간은 공간적 변화를 통해서 감각체계 안에 들어와 인식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시간의 흐름으로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사실 시간과 공간은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다. 시·공간을 체용구조로 본다면, 시간을 체라 하고 공간은 용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주역에서는 시중時中, 시의時義, 시의時宜, 시위時位라 해서 그 때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그 때란 어떤 시간을 의미하는 것일까. 시는 어느 위치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주역에서 말하는 시간은 태극 안에서 음과 양이 갈마들며 움직이는 공시성共時性의 시간이면서 내가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시간이다. 주역 설괘전에서 ‘역은 수를 거스른다易 逆數也’라고 기술하고 있고, 계사전에서는 ‘신묘함으로써 미래를 알고 지혜로써 행하는 바를 감춘다神以知來 知以藏往’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주역의 점괘로 나타내는 예측은 시간의 문제라 볼 수 있다. 시공간적으로 제한된 삶을 살면서 늘 분별하는 관점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은 미래를 미리 알 수 없는 존재이다. 시간의 제한은 바로 인간에게 부여된 운명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의 길흉은 시간과의 불일치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모습처럼 과거-현재-미래가 서로 물고 물리는相卽相入 공시성의 시간이라면 점을 통해 아는 미래예측은 무엇이고, 운명은 무엇일까.
4. 우주관의 문제
절대적 시간이 없다면 시·공간 구조로 설명되는 우주관은 무엇일까. 현대과학의 성과인 우주의 탄생을 설명하는 빅뱅이론에 의하면 시간은 있음에 대비되는 없음으로서의 상대적인 무가 아닌 절대적인 무, 그 한 점에서 탄생되었음을 전제로 한다. 빅뱅 후 시공간은 무수한 차원으로 퍼져 나가면서 지금도 팽창하고 있다고 한다.
64괘로 이루어진 주역은 어떤 우주관을 내포하고 있는지 뚜렷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떤 상황에서 괘와 효를 얻는 바로 그 순간, 시위時位가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설명해주는 우주관이 주역에 내재되어 있지 않다면 주역의 점은 어쩌면 논리적 타당성을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주역 64괘의 구성은 8괘의 착종錯綜으로 이루어진다. 즉 64괘는 건乾과 곤坤이 본체로 서면 그 안에서 일음一陰과 일양一陽이 발동하여 하늘과 땅이 기운을 교환하고 수화水·火의 작용을 통해 팔괘가 착종되면서 괘가 차례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본다. 건곤에서 시작한 괘들은 기제旣濟, 미제未濟卦로 끝나지만 다시 시작하여終則有始 무궁히 순환하는 모습이다. 천부경에서도 하나一에서 시작하여 수없이 가고 오고 다시 하나一로 순환하는 우주의 모습을 제시한다. 주역의 우주관은 공시성의 관점에서는 양자역학 및 카오스이론, 그리고 복잡계라는 관점에서는 혼돈계, 태극-음양-사상으로 분화하는 관점에서는 자기조직하는 시스템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여전히 28별자리와 같은 고대 천문 역법이론에 토대를 둔 점괘의 해석은 어떤 과학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5. 예측의 문제
미래예측은 주역이 탄생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지금은 그 자리를 빅데이터로 무장한 인공지능이 대신하려고 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수준은 이미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대결에서 보았듯이 신선들의 놀이라고 간주되어왔던 바둑을 계산 가능한 게임으로 격하시켰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미래예측은 복잡한 현상계에서 중요한 인자들을 추려내어 그 인자들의 영향을 감안한 예측모델에 의하여 수행된다. 따라서 미래예측모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 변수들을 정밀히 뽑을 수 있느냐, 그리고 변수들 간의 관계를 얼마나 유기적으로 잘 구축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주역의 미래예측은 어떤 것인가. 주역은 천天이라는 블랙박스에 점치는 자의 양자택일식 질문에 대한 답으로 미래를 예측한다. 점괘의 해석은 내 마음을 돌이켜 흉함과 후회를 줄이거나 감당할 수 있는 준비를 하게 해준다. 하지만 나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길흉은 사회 속에서 발생되는 것이기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구조의 변화에 대해서 스스로가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기에 주역공부는 자칫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인식되거나 염세주의로 흐를 개연성이 높다. 주역에 달통한 도인들이 세속을 피하는 이유도 이와 같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기인된 한계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점괘의 해석은 결국 점사를 묻는 자의 학식과 덕에 달려 있다. 그래서 주역은 세심경洗心經 또는 군자학이라고 불리어진다. 주역의 점을 잘 해석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행적을 많이 알아야多識傳言往行한다고 말한다. 이는 어떤 물음에 대해 끊임없이 배우고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주역의 점에 능통하려면 폭넓은 공부가 병행되어야 한다. 주역본의를 저술한 주자도 그가 살던 시대의 철학적, 과학적 지식을 습득하여 각종 집주와 주역본의를 저술하여 후학들에게 길을 안내하였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의 주역공부도 심리학이나 뇌과학 등의 다양한 학제와의 연계를 바탕으로 보다 심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반면 심성心性의 수행적인 측면에서는 상象과 괘·효사卦·爻辭의 체득을 통해서 욕심을 씻어내고洗心, 마침내 천하의 연고를 통한다感而遂通天下之故는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 주역에서 점을 치는 궁극적인 의미는, 군자가 되고, 더 나아가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6. 홍범과 하도낙서와의 관계
어떤 역학자는 홍범에서 말하는 오행이 물질차원의 오행으로 상생상극이 빠져 있다고 주장하면서 상서 홍범편을 전국시대의 창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반면, 의리역 학자들은 오늘의 주역이 점집의 상품으로 전락한 배경에는, 오행을 받아들여 술수역術數易으로 전락한 데 있다고 보고 오행체계를 주역에서 분리시킬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홍범과 주역, 즉 음양과 오행을 결합시킨 역의 당위성과 독창성은 무엇일까.
최초로 오행을 언급한 홍범과 음양을 말하는 계사전의 하도, 낙서는 어떠한 연관성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낙서는 하도에서 금과 화를 바꾸고金火交易, 우측으로 회전하면 만들어지므로 이 둘의 관계를 분리된 상생상극이라 한다. 하도와 낙서의 분리성이 아닌 상생과 상극의 조화를 통한. 즉 하도와 낙서를 종합한 하락총백도와 같은 역도易圖도 있다. 새로운 역해석의 틀이 열렸는지 알 수 없지만 하도와 낙서, 복희8괘와 문왕8괘의 관계를 고려한 새로운 8괘 모형이 필요하다는 반증으로 볼 수도 있다. 정역에서는 정역팔괘를 만들어 역의 해석을 하고 있다. 다가올 시대의 역의 해석을 위해서 설괘전에서 제시하는 문왕팔괘와 복희8괘를 넘어서는 새로운 8괘가 만들어지게 될 것인가.
7. 8괘와 64괘를 복희씨가 만들었다면 과연 복희씨 성인의 창작물일까?
우리가 사는 세계의 위대한 업적과 발견은 그 시대의 지식과 지혜의 종합적인 상호작용의 토대 위에서 나온 결과다. 8괘가 나올 수 있는 인식적 토대가 없는 상태에서 과연 복희씨만의 8괘가 가능할까. 8괘가 태극-음양-사상-8괘-64괘로 전환되는 고도의 사유체계의 바탕 위에서 나왔다고 추정한다면, 문자가 없던 시기의 복희씨는 어떻게 그러한 사유가 가능했을까.
주역해석의 가장 기본 틀인 팔괘로 복희8괘와 문왕8괘가 있다. 8괘 각각의 괘·상의 배속에 대해 설괘전에서 제시하고 있지만, 점괘 해석의 일반화된 관점으로 연관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형상을 보고 팔괘에 대비시켰는지, 아니면 팔괘의 괘상에 맞추어 사물을 대비시켰는지조차 애매한 점이 많다. 팔괘가 독립된 원소의 개념이 아니라 서로 변통하는 관계이다 보니 학인마다 얼마든지 달리 볼 수 있는 여지가 많다. 8괘의 괘·상을 취하는 과정은 먼저 복희8괘의 대대관계의 관점에서 보고, 다시 기운의 유행관계를 고려하여 문왕8괘와 연관시켜 해석한다. 팔괘의 각 상마다 이러한 관점으로 분류되어야 하지만 학인들마다 비약과 견강부회식 해석이 많아 논리적인 일관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래서 분별이 아닌 체득의 경지에서 8괘 취상을 바라볼 것을 요구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방법이 주역을 공부하는 초학자들에겐 합리적이 아닐 수 있기에 불편할 따름이다.
64괘에 대해 계사전에서는 팔괘가 열을 이루니 상이 그 속에 있고, 거듭해서 중첩하니 효가 그 속에 있다八卦成 象在其中矣 因而重之 爻在其中矣라고 기술하고 있다. 문왕이 복희 8괘의 바탕 위에 거듭하여 64괘와 괘사를 만들고 주공이 효사를 지었다는 과정은 복희와 문왕간의 시대간 간극이 너무 커서 타당성을 주장하기엔 석연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8괘에서 64괘로 가는 과정은 수리적으로 일정팔회법一貞八回法에 의해 논리적으로 분명하다. 반면 주역의 착종과 배합방식에 의한 통행본 서술체계(건-곤-둔… 기제-미제)는 왜 그렇게 구성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기록이 없다. 더더욱 주역 괘의 구성 순서가 일정팔회법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8. 점괘는 과연 하늘의 상天垂象을 나타내 주는 것인가?
주역의 점괘가 왜 맞는지를 궁구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신명계의 전지전능한 힘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라고만 한다면, 보이지 않는 세계는 영원히 비밀의 문 안에 감추어질 수밖에 없다.
주나라를 건국한 무왕과 강태공이 점을 친 고사를 통해 점괘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점괘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를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인간이 점의 결과에만 매달린다면 또 다른 무지의 신에게 복종하는 일이 된다. 주나라의 탄생시기에도 강태공은 점괘를 부정하고 오히려 행위의 대의명분을 중요시함으로써 새로운 역사의 흐름을 이끌었다. 주역 점사의 해석도 사유의 합리성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주 무왕이 강태공과 함께 은의 주왕을 칠 때 점괘와 취한 행동은 다음과 같다.
1) 출병하기 전 점괘 : 거북의 등껍질과 톱풀을 사용하여 친 첫 번째 점괘는 대흉, 두 번째는 더욱 흉하였다. 이에 강태공은 점쳤던 도구들을 쓸어버리고 “거북의 등껍질과 톱풀은 말라빠진 뼈다귀와 죽은 풀에 지나지 않는데 이것들이 어떻게 길흉을 예측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면서 즉시 출병을 주장한다.
2) 국문을 나서자마자 갑자기 휘몰아친 큰 바람이 군기의 깃대를 꺾어버린다. 이런 불길한 조짐을 주 무왕은 오히려 하늘이 병사를 내린다는 말天落兵이니 하늘이 주나라를 돕는다고 해석하고 군대를 이끈다.
3) 목적지에 도착하여 다시 무당에게 점을 치라고 하나 거북의 등껍질을 구울 불조차 꺼져버린다. 무왕은 이것은 하늘의 뜻으로 불이 꺼진 것은 은나라가 반드시 멸망할 것임을 표시하는 것이므로 다시는 점을 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주위를 안심시킨다.
4) 목야의 전투에서 은나라를 멸망시킨다.
9. 주역의 지향점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 중국 한나라의 주역이 들어와서 주류를 이루다가 고려 말에 비로소 송나라의 의리역義理易이 들어오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주역은 선비들이 공부하는 경전 중 가장 어려우면서도 한번은 깊이 공부해야 하는 과목이었다. 조선후기에 접어들어 현실의 암담함에서 활로를 찾지 못한 재인才人들이, 후천의 세계를 꿈꾸며 심혈을 바쳐 주역을 공부하여 명맥을 이어오게 하였다. 요즈음에는 젊은세대가 주역을 배우려하지 않는다. 기껏 주역공부는, 한의과 학생들이 한의학의 이해를 위한 징검다리 공부라고 인식할 정도의 수준이다. 주역과 그다지 관련이 없는 명리나 풍수와 연관하여 접점을 찾는 정도다. 변화의 학문이면서 천지를 두루 감싸는 주역이 오히려 시대의 변화에 밀려 미로에 빠져있는 느낌이다.
주역은 대상을 모순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현상을 일음일양一陰一陽이라는 변화과정 속에서 상생과 상성相成의 상호관계로 이해하는 학문이다. 그런 점에서 개인의 개체성이 강화되고 관계 속에서 심리적으로 갈등구조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모순과 통일이라는, 즉 대상과의 유기적 관계를 추구하는 주역의 열린 사고는 여전히 가치를 가질 수 있다.
주역공부의 장점은 상징성의 해독으로부터 얻게 되는 사물의 해석능력과 사물을 보는 다양한 관점을 익힐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러한 체험을 통해 일에 대한 경중과 행동의 완급을 조절할 수 있게 된다. 개인들은 복잡다단한 삶속에서 변화의 기준을 세워 삶을 이끌어 나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젊은 세대의 주역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젊은이들의 욕구와 시대의 변화에 맞게 주역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주역의 전달체계와 쉽게 공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깊이 있고 다양한 고민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주역공부를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동기부여를 젊은이들의 고민에서 찾아야 한다. 나아가 주역공부가 현실의 삶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를 체화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찾아야 한다.
주역이 가진 특수성과 보편성 중에서 보편성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도 중요한 과제다. 주역이 살아있는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경문과 주역공부의 안내서인 계사전, 설괘전 등을 철학적 사유체계로 알기 쉽게 풀이하여야 한다. 현실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가치체계를 뽑아서 말해주는 한편, 과학을 포함한 타 학문들이 가진 각각의 논리와 주역의 논리가 접촉될 수 있어야 한다. 경문을 읽다보면 과거와 현대의 생활양식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 어쩔 수 없이 점사가 갖고 있는 본질적인 특수성 등이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는 주역해석의 대중화에 큰 걸림돌로 작용하므로, 현대인의 감성에 맞는 표현방식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오랜 세월 한의학, 풍수, 명리학, 건축, 다도, 병법 등 문화생활 전반과 연결되어 있던 주역의 원리들이 실생활은 물론 현대 학문과의 연계선 상에서 새롭게 부각되어야 한다. 이런 일이 가능할 때 주역은 살아있는 학문으로서 계속해서 다음 세대로 전승될 수 있을 것이다.
수천년 동안 주역에 알게 모르게 입혀진 신비의 옷을 벗겨야 한다. 주역을 달통하면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는 믿음도 배격해야 한다. 오히려 주역공부로 이룰 수 있는 부분과 이룰 수 없는 부분을 명확히 구분해서 접근해가야 한다. 그럴 때 주역은 인간이 당면하고 있는 고뇌를 해결하는 단서를 보여 줄 것이다.
10. 주역의 수양론
주역과 관련된 수양론은 내적으로는 강건하고 외적으로는 쉼 없이 나아간다自彊不息는 말로써 압축될 수 있다. 복희, 문왕, 주공() - 공자() - 위·진시대() - 한나라() - 송나라() - 명·청으로 이어지는 역학의 사상흐름에서 북송시대의 주자와 장재에 의해서 역학해석의 큰 흐름이 나누어졌다. 역에 대한 주자의 이기氣를 통한 해석과 장재의 기일원적 해석이 그것이다.
주역경문의 해석에서 가장 아쉽게 느껴지는 점이, 몸에 대한 구체적인 수행체계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기일원론적 체계에서는 몸과 마음을 하나로 본다. 몸을 떠나서는 마음의 성리性理를 제대로 정립할 수 없다. 주역 계사전에서는 본심을 지키는存心 것을 말하고, 간괘艮卦에서는 그 등背에서 그침艮其背를 이야기 한다. 어디에 존심을 하고 어떻게 마음을 그치게 할 것인가. 단전에 존심을 하면 선도수련으로 연결된다. 주역과 선도수련은 중국 위진魏·晉시대 위백량에 의해 주역참동계라는 저술이 나온 이후, 뚜렷한 진전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주역이 제시하는 귀의처는 결국 마음을 씻고, 무사·무위의 경지에서 사물과의 만남에서 오는 경계를 무심히 받아들이는 수양론에 있다. 일상에서 주역 괘효사를 보는 관觀공부를 통해 마음의 때를 하나씩 벗겨나감으로써 세상사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평정한 심리를 회복한 수 있을 것이다.
심신의 조화를 말하는 주역은 현대과학에서 밝혀낸 인체원리, 한의학의 구성원리 등과 접목되면 새로운 의학체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수양론으로서 주역적 원리는 심신의 조화가 필요한 현대사회에서 아프기 전에 병의 원인을 미리 다스리는 양생의 지혜를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1. 주역에서 나오는 등장인물과 수양론
주역에는 군자, 성인, 대인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외에도 제帝, 선왕, 후, 상, 소인, 이주豐卦 九四爻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그 정확한 개념과 의미가 밝혀져야 한다. 주역은 수양을 통한 군자학이라고 볼 수 있다. 소인이 역을 공부한다고 대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인지, 타고난 재질을 주역 공부를 통해 바꿀 수 있는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수양론으로서 의미 있는 가치를 가지려면 수행의 단계마다 도달할 수 있는 과위果位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불교에서는 성문사과와 보살, 부처 등 수련의 단계마다 도달하는 위位가 있다. 주역에서도 그와 같은 단계를 밝힐 수 있어야 수양론으로서의 의미를 좀 더 분명히 가질 수 있을 것이다.
12. 주역의 논리구성과 전달
주역은 상과 수로서 나타내고, 진리는 점자와 독자에게 맡겨놓고 스스로 깊이 음미하고 사유하게 한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육효의 변화를 궁구하고 효에 붙은 말을 숙독하는 과정에서 점점 분별하는 마음의 때를 벗기는 경지로 들어간다. 침잠하여 사색하는 가운데 새롭게 터득하는 기쁨을 얻게 된다.
주역의 해석논리는 상당히 어렵다. 주역해석의 가장 큰 장점이면서도 단점은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혹자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논리라고도 한다. 사실 세계는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이나 모호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기에 역설의 논리체계를 갖고 있는 주역은 다양한 관점으로 복잡한 현상을 해석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그 함의가 크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음과 양,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이 서로 갈마들며 변하고 있고 그 중간에 기氣라는 중간자가 끼어있는 삼중구조로 구성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인과성에 기초한 단일성의 논리만으로는 현상을 완전히 해석할 수 없고, 모호성만이 전부라고 하면서 인과성을 부정할 수도 없다. 단순성과 모호성의 양 논리를 종합할 수 있어야 새로운 역의 해석체계를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주역풀이는 서당書堂시대를 살아온 학인들에 의해 한문경전이 한글화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행해졌다. 단어에 대한 정확한 뜻풀이 없이, 상징성과 모호성을 그대로 둔 채 번역되다 보니 의미의 정확한 전달측면이 어려웠다. 주역의 한글화 작업은 정신세계의 깊이와 넓이를 정확하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주역해석의 일관된 틀은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다. 효변, 호괘, 착종, 납갑, 추이 등 많은 방법이 있다. 이런 방법들이 어떤 괘에 대해서는 부합하지만 다른 괘에 적용하면 모순에 빠지기도 한다. 대부분의 학인들이 일관된 방법에 의해 해석하지 않고 괘·효사에 따라 임기응변식으로 적용하다 보니 주역해석의 한계가 드러났다. 현재까지 주역해석의 유용한 해석의 방법으로, 괘의 순서와 이름과 뜻, 내·외괘의 이름과 뜻, 내괘와 외괘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살피고, 육위六位로 나누어서 강유剛柔, 음양陰陽, 왕래往來, 주효主爻, 응·비應·比, 중中(위位로 풀이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 의한 괘의 해석이 64괘 전체 효에 대해 체계적으로 적용되어 해석되지 않고 있다. 학자에 따라 의리에 치중하거나 상수적인 관점에서 풀이하거나, 또는 둘을 절충하여 해석하여 왔다.
수많은 학자들의 해석방법 중에서도 송대의 정자와 주자에 의한 주역전의는 상수보다는 의리에 치우쳐 해석하고 있고, 또한 도덕적 관점을 견지한다는 비판도 받는다. 하지만 주역 해석의 폭, 64괘의 전체적인 회통, 문장의 유려함을 지녔다는 점에서 주역공부의 충실한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13. 선후천의 문제
주역 건괘 문언전에 하늘보다 먼저 해도 하늘을 어기지 않고 하늘보다 뒤에 하여도 하늘의 때를 봉행한다先天而天弗違, 後天而奉天時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서 선천과 후천이란 말이 나타난다. 소강절은 복희역을 선천역, 문왕역을 후천역이라고 하면서 현재의 세계는 후천이고, 그 이전의 세계는 선천이라고 보았다. 후천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이냐에 대해 학인들마다 다양한 견해를 제시한다. 후천의 시점이 왜 중요하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 후천이 오면 천지도수가 바뀌어 지축이 다시 선다고 하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과학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다.
선후천 교역시점을 동북아라는 지정학적 측면에서 보아, 우리나라의 공화국 성립과 같은 큰 사건을 계기로 후천이 열렸다고 보는 주장도 있다. 주역은 천지를 다 아우르는 도이므로 주역의 도를 깨우치면 천지자연의 변화를 알 수 있다고 하는데, 너무 중국이나 한국 중심의 시야에 갇혀 선후천의 문제를 논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세계의 운명을 바꾼 사건은 너무나 많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특정한 시점을 중심으로 선후천 교역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견강부회식 해석으로 비춰질 수 있다.
피흉추길이 내 마음속에 있다면 선후천의 개념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남녀의 위상변화를 따져서 선후천이 왔다고 하면 지금의 힌두권과 회교권의 여성권리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리고 후천이 온다고 할 때 종교 간의 화해도 동양권의 유불선 회통만이 아닌 가장 큰 종교세력을 가지고 있는 회교, 기독교를 모두 포함한 회통이어야 한다. 사실 동양에서, 유불선은 겉으로는 갈등적인 양상을 보이면서도 안으로는 태극의 원리처럼 상호교류와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 보완적 기능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선후천은 천도의 변화에 의한 외부 요인에 의한 결과라고 보기보다 개인에게 주어지는 상황에 대한 마음의 문제로 해석해 보아야 한다. 궁극적으로 점괘의 해석은 내 마음의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개개인의 의식의 확장에 의한 관점의 전환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사회현상을 기준으로 선후천을 고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해석의 다툼이 클 수밖에 없다.
14. 역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주역 공부의 목적이 미래를 알기 위해 점을 치는 것이 아니라면 주역을 공부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주역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깨끗하고 정밀하고 자세하다고 할 수 있다. 주역을 공부함으로써 외물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서 마음이 고요해지면 일의 조짐을 미리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계발되게 된다. 일이 다가옴에 바로 사물의 시작과 끝을 그려볼 수 있기에 처신함에 적합한 때에 자기의 중심을 지키면서 대응할 수 있다. 그러기에 굳이 일마다 점을 치지 않더라도 평소에 주역의 괘사와 효사를 읽다보면 특정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을 키울 수 있는 모의(simulation) 연습을 하는 것과 같다.
주역은 일종의 삶의 지침서이며, 주역공부는 인생의 폭과 깊이를 넓고 깊게 만들어 준다. 주역 경전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이치는 결국 삶에 대한 나아감과 물러남, 그침과 머무름의 바른 때를 읽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5. 주역공부의 여정
모든 공부는 몸의 수행을 떠나서는 관념론에 빠지기 쉽다. 주역공부도 효사와 괘사의 의미만을 음미하고 유추하다 보면 자칫 관념론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일반적인 경서공부와는 달리 거듭해서 보아도 질리지 않으며, 게다가 공부한 만큼 이해의 깊이가 깊어지고 폭이 넓어지는 특별한 맛은 분명히 있다.
64괘의 괘사와 효사는 원전은 물론 한글로 읽어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어떤 학자는 주역해석에 있어 주역경문으로 주역 자체를 연구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런 해석방법은 경문의 다의성, 은유성과 간결성, 이천년 전의 한자와 지금 한자와의 괴리에서 오는 언어적 단절이 근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자칫 독단적이며 고립된 경향으로 빠질 우려가 있다.
몇 천 년 동안 많은 학인들이 주역을 공부하여 자기만의 일가를 이루어 많은 저서를 남겼다. 주역의 책들은 갖가지 꽃의 무리와 같다. 저마다의 견지를 주장하며 주역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펼쳐 보인다. 처음 주역 공부를 시작할 때에 주역이라는 산이 얼마나 넓고 높은지 가늠이 되지 않아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이 책 저 책을 읽었다. 십년 이상의 긴 시간 동안 몇 번을 읽고 들어도 주역공부는 체계가 잡히지 않은 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정도로 앞길은 희미할 뿐이었다. 아는 것도 아니고 아주 모른다고 할 수도 없고, 정작 무엇을 공부했다는 흔적도 뚜렷이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그만두기에는 그동안 들인 노력이 아까워 포기하기에는 미련이 남았다. 허허한 마음을 달래고자 이런저런 강의만 기웃거리는 시간만 계속되었다.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돌이켜보니 상수와 의리 전반에 걸쳐 전체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는 책을 집중적으로 읽어, 내 공부의 중심으로 삼지 못했다는 데에 있었다. 그동안 주역공부를 위해 많은 종류의 책을 개략적으로 읽어 보았다. 학계 쪽에서 나온 책은 상대적으로 논리적이지만 깊이가 없어 맛이 없다. 반면 재야 쪽에서 나온 책은 하나로써 꿰뚫는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정신으로 회통하게 썼지만, 한글로 전달하는 수준이 미흡하여 표현의 한계를 드러냈다.
나의 관점에서 주역에 관한 책 중에서 주역전의는 주역을 가장 체계적이며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는 책이다. 의리와 상수를 다 같이 고려하며, 일관성 있는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학인들은 한번은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주역을 공부한다는 학인들 중에서 원전으로 된 ‘주역전의’를 혼자서 제대로 한 번 완독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주역공부를 시작할 때 경문과 함께 처음부터 주역전의를 정독해서 공부의 중심을 잡았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한문공부에 따른 부담감으로 힘들 수도 있겠지만, 느리게 가는 것이 빨리 가는 방법일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공부의 중심을 잡은 다음 다른 책들을 비교·참고하면서 공부해 나갔으면 주역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깊이도 깊어졌을 것 같다. 최근에 만난 학역필담은 주역의 접점을 근대로 확대하고 주역해석의 깊이를 깊게한다는 점에서 관심이 가는 책이다.
주역공부는 지름길이 없다. 끈기와 호기심, 가볍지 않음이 공부에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주역은 진득하게 파고들지 않으면 숨겨져 있는 깊은 뜻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 것 같다. 오솔길을 찾지 말고 곧장 큰 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주역은 산과 같다. 워낙 크고 깊은 산이라 접근마저 가볍게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도 조금씩 묻고 들으면서 길을 가야 한다. 하나의 산봉우리에 오를 때마다 그만큼의 경치를 보여주기에 계속 더 높은 산봉우리로 올라가게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