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거대한 벽
레드, 거대한 벽
재만 덩그렇게 남았다. 그가 일으킨 구름 같은 이야기와 생생한 불빛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니 봄날의 벚꽃처럼 화려하게 피어나다 일순 바람에 흐트러지는 낙화가 되었다. 서울에서 마크 로스코 특별전시회가 개최되었다. 거의 두 달 동안 로스코와 관련한 기사가 봄날의 새싹처럼 곳곳에서 돋아났던 기억이 난다. 그림에 문외한인 나조차도 그의 그림전시를 보지 않으면 소양 없는 사람이라도 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마크 로스코 특별전시회가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다는 기사가 큼직하게 보였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지만 생소함을 훌쩍 뛰어넘어 신드롬이라고 할 정도로 언론은 호들갑을 떨었다. 추상표현주의자, 단순함의 미학을 창조한 사람,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그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사람, 말들의 수사 앞에 그는 거의 신화와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그림에서 선이 아닌 색으로 공간을 경계 짓는 사람, 비극이나 운명 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감성을 표현하는 화가 등 많은 수식어도 따라 붙어있었다. 미술에 까막눈인 사람도 한번 가서 보고 싶은 느낌이 절로 들었다.
서울에 갈 일이 생겼다. 그동안 번잡함이 싫어서 주어진 일을 끝내면 곧장 대전으로 내려갔지만, 이번에는 길을 찾아서 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마크 로스코 특별전시회에 가기로 했다. 여름이고 더워 숨이 탁 막힐 것 같았다. 그곳에서 그림 관람은 처음이었다. 관람료가 좀 비싸다는 느낌이 들었다. 먼저 입구에서 마크 로스코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감상하였다. 마치 철학자 같은 말들의 진수성찬이 그림처럼 그려져 있었다.
‘그림은 인간의 감정 저 밑바닥에 있는 본질을 끄집어내는 것이고 그림은 화가가 붓을 놓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킬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림은 사람과 교감함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감상자에 의해 확장되고 성장한다.’ 마치 그림과 나 사이에 있는 무지의 장벽을 알아서 훌훌 걷어내 준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림이란 이 방면에 재능있는 특별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라고 여겼다. 적어도 그림은 노력한다고 되는 경지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림이란 도구를 통해 삶의 진지한 문제까지 접근해서 근원적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말에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그동안 미술사에서 자리매김한 숱한 화가들은 그림을 그릴 때 순수한 감정의 밑바닥까지 도달했을까. 고흐나 피카소는 우리가 그림을 보고 느꼈던 그런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을까. 우리가 그림을 보면서 받는 느낌과 화가의 의도는 비슷한 연속선 상에 있을 수 있을까. 내면 깊숙이 던져진 그의 말들은 그림을 보기도 전에 내 마음속에서 잔잔한 파도를 일으키며 무지의 가장자리를 조금씩 열면서 들어왔다.
신화의 시대부터 부활의 시대까지 시대 순으로 진열된 그림을 따라 관람하였다. 처음엔 정물화, 약간은 피카소풍이거나 아프리카의 강렬한 원색의 흔적을 보여 주다가 점점 다양한 표현을 거쳐 마침내 형체는 없어지고 단순한 색채로 구현되는 지점까지 왔다. 검은색과 강렬한 붉은 색으로 덧칠한 그림들로 전시작품의 배치가 마무리되어 있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속담이 있다. 너무 기대가 컸던가. 그의 그림과 공감이 되지 않으니 머리는 무거워져 갔다. 역시 미술은 난해했다. 게다가 추상표현미술이 아닌가. 이해를 가로막는 벽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로스코 채플방’, 무덤 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을 주는 곳, 죽음에 대한 진지한 몰입을 통해 새로운 에너지와 위로받는 치유를 경험할 수 있다는 곳이라고 했다. 온통 검은 색의 어두운 그림 앞에서 자리를 깔고 지그시 눈을 감은 채 호흡을 골라 본다. 그림 속에 들어가고, 그림이 내게 온다는 마음으로 눈을 감아도, 소통되거나 연결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다시 눈을 뜨고 검은 그림을 정면으로 응시해 보았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휑한 느낌은 마찬가지였다.
비극적 경험이 예술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자살하기 직전에 그렸다는 ‘레드’ 앞에 섰다. 감상자가 울음을 터뜨렸다는 이야기로 유명세를 탄 그림이다. 온통 붉은 색칠로 덧칠해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붉은 색은 공포나 두려운 색깔로 선험적으로 인식되어 있다. ‘레드’를 본 순간 내면 깊은 울림을 통해 감동을 받았다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선입견인지 역시 아무리 응시해도 눈물은커녕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다. 미술 감상도 밑바닥에 있는 집단 무의식의 영향을 받는 것일까. 아니면 너무나 많은 내 안의 생각들이 충돌하여 그림 그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순수성을 상실했기 때문일까.
요란한 로스코 미술세계와의 첫 만남은 데면데면 끝났다. 아직 미술을 감상할 안목이 부족한 나에게 추상표현미술은 거대하고 난해한 벽이었다. 예술의 경지가 높으면 모든 형체는 해체되고 남는 것은 오로지 표현하기 위한 최소한의 선이나 색, 아니면 극도의 단순함일 게다. 절제를 뛰어넘는 단순함은 무슨 분야에서든 최고의 고수다. 아이러니하게 그림에 그렇게 많은 철학적 의미들을 담아낸 화가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일생과 그림이 대비되면서 로스코의 그림은 감상자들에게 어떤 울림으로 전달될 수 있을까. 그는 그림을 창조했지만 그림으로 표현된 자기의 뜻을 대중들이 알아주지 못하는 데서 좌절하였다고 한다. 그는 왜 보편적이고 평범한 심리상태로 돌아가지 못했을까.
삶의 밑바탕에는 본질적인 슬픔만이 있을까. 동양의 산수화나 문인화는 삶의 긍정적인 본질을 표현한다. 서양의 화가들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이 더러 있는 반면 동양의 화가들은 팍팍한 삶일지라도 현실에서 노닐다 갔다. 치열한 예술정신과 삶, 이 양자 사이에 조화될 수 있는 공간은 허용될 수 없을까. 그림을 통해 삶의 밑바닥에 있는 감정을 담는다는 점에서 마크 로스코는 오히려 동양적이라고 생각되지만, 그의 생에 대한 의지는 그렇지 못했다.
글로는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로는 그 뜻을 다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로스코는, ‘화가는 그림으로서 자기 뜻을 다하고 감상자는 그 뜻을 느낄 수 있다’ 라고 말했다.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욕구는 그림을 그리기 전의 마음, 즉 본질적인 감정을 충실히 반영하여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림은 그림일 뿐이다. 보는 이의 마음이 열려 있지 않으면 그림을 보아도 그림과 나는 분리되어 그림이 주는 아우라를 느낄 수 없다. 결국 그림은 화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감상자의 몫으로 남을 것 같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같이 본 친구는 저런 그림은 나도 그릴 수 있겠다고 한다.
복사된 레드 그림을 샀다. 지금은 그의 그림과 내 사이에 서로 공감하지 못하는 커다란 벽이 있지만, 세월의 어느 순간에 그의 붉은 덧칠이 가슴울림으로 다가올 인연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