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맹자를 만나다

비들목 2020. 2. 7. 00:18

맹자를 만나다

가슴이 좁아졌다. 벽이라도 있는 듯 답답하다. 어딘가에 기대서 숨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싶다. 어느덧 중반을 넘긴 채 인생의 후반전을 맞고 있다. 지천명을 넘어 이순에 이르는 나이인데도 세상과 나는 점점 빗겨간다는 느낌이 든다. 앞날을 생각하면 가야 할 길은 안개가 낀 듯 흐릿하다. 한동안 오래된 사람과의 단절이 불쑥불쑥 찾아와 가슴을 먹먹하게 할 것 같다.

 

점점 죽음과 인생의 의미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하늘을 바라보기보다는 고개를 숙이는 일이 많아졌다. 삶 속에서 삶을 모르듯, 내 삶의 방향이 어디로 향해 가는지 알 수 없다. 오직 모를 뿐인 세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현실의 견고한 성을 깨뜨리는 울림이 내면에서 조그마한 파문도 일으키지 않은 채 일상에 묻히고 있다. 머리로만 알고 있기에 허허한 마음을 채우지 못한다. 그러기에 인생은 그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여행과 같다고 한 것인지. 인생은 수수께끼의 연속이다. 어떻게 태어난 존재인가. 억겁의 인연으로 태어난 존재가 세상을 살다가 사라져간다. 그냥 사는 게 당연한 듯 살아간다.

세월을 먹은 만큼 보고 들어 아는 것이 많아지면 생각의 크기도 그만큼 커져 넓게 볼 수 있을 텐데 그렇지 않는 것 같다. 점점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신세가 되어간다. 마음이 담기는 그릇은 작아지고 심사는 좁아져 어린애의 마음처럼 들쭉날쭉해진다. 주위를 둘러보면 나 혼자만의 특이한 현상은 아니다. 가끔씩 속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고독감은 가을이 떠나갈 즈음 가슴이 시리는 느낌과도 흡사하다. 이럴 때는 나라는 존재가 누구인가에 대해 의구심이 물밀 듯 밀려온다. 현실의 두꺼운 벽에 가로막혀 평범한 존재로 묻어둔 나라는 놈을 다시 세상으로 끌어내 자유로이 날게 하고 싶었다.

 

세상을 사는 일은 관계의 사다리를 오르는 것과 같다. 그런 단계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가슴속에 묻어두기도 하고, 듣고 싶지 않는 이야기도 들으면서 살 수밖에 없다.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권력자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말해주지 않고, 그들 앞에서 너무나 당당하게 자기 존재의 소리를 낸 사람이 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세상물정에 어두운 사람이라고 했다. 사회대격변의 시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인 맹자의 이야기다. 그는 우리에게 시대적, 공간적으로는 꽤나 멀지만 친근한 인물이다. 맹모삼천 이야기도 있고. TV로 방송된 사극 정도전에서도 그의 정신이 은은히 배어 있었다. 주자학의 세상인 조선을 설계하였다고 할 수 있는 삼봉의 밑바탕엔 맹자의 민본정신이 깔려 있었다.

 

맹자라는 책은 송대 유학자들에 의해 그 가치를 인정받아 필수 공부과목인 사서에 편입된 책이다. 맹자는 그 당시 성행한 묵가와 도가 등 제자백가와 치열한 이념적 논쟁에서 공자를 살려 내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그는 공자의 인 사상에 의와 양기養氣라는 개념을 보탠 공로로 아성亞聖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혼란하고 혼돈스럽다. 저성장, 고령화, 낮은 출산율, 취업난이 서로 맞물리면서 불안정이 시대의 화두로 되었다. 한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은 너무나 강하기에 깨고 뛰쳐나가기가 녹록지 않다. 우리들은 현실의 무게에 낚여 점점 무기력해져 가고 있다. 세상이 자기와 빗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호연지기로 자기의 신념을 전하고자 했던 맹자가 지금 살아 있다면, 그는 우리에게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어깨를 활짝 펴라고 말할 것이다. 맹자라는 책엔 논리가 다듬어져 있고 좁아질 대로 좁아진 필부의 가슴을 호탕하게 씻어내는 글이 많다. 대장부를 묘사한 그의 글은 읽는 것만으로 속이 시원해진다.

 

처음 맹자를 볼 때 그 부피의 방대함에 질려 혼자 공부하기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뜻이 있으면 길이 열려지듯이, 참 묘하게 인연이 찾아온다. 퇴직을 앞두고 미래를 고민할 무렵 진주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찾듯 자연스럽게 향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맹자를 강의하고 있었다. 거의 이 년을 맹자의 뜻에 취하고 그의 꿈에 취했다. 처음엔 그를 돈키호테처럼 너무나 현실과 거리가 먼, 그냥 허풍만 잔뜩 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문득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란 무대에 자기의 이상을 펼치기 위하여 군주를 찾아갔어도 그의 내면은 권력이나 세상에 의해 좌우되지 않았고, 마주칠 결과에 번민하지 않았다. 현실의 벽에 갇혀 있는 나로서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간다는 것은 꿈도 꿔 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그의 글은 말로 던져져 나에게로 들어왔다. 그의 말은 은은한 향내를 가진 매화의 향과 같았다. 인연만큼 있을 수 있었기에 맹자의 글이 메아리치는 향교를 떠나야 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홀로서기를 위한 공부가 시작되었다. 나이 탓인지 돌아서면 책은 책이고 나는 여전히 나였다. 원래 한문이라는 언어체계가 그렇듯 언어적 어려움이 장벽으로 놓여 있었다. 몇 번을 보고 보아도 맹자와 나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있는 방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직은 그의 당을 겨우 쳐다보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이 가면 그의 이야기를 벗 삼아 홀로 지낼 수 있는 힘이 조금 생길 수 있을 테다.

 

가까이 있거나 정들었던 사람과의 인연이 헤어짐이라는 숙명으로 다가오는 횟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만남보다 이별하는 일에 더 익숙한 나이임을 실감한다. 지구상에 남아 있는 여행의 시간이 세포의 텔로미어처럼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사실 앞에 비애만 느낀다. 앞으로 갈수록 나란 존재는 한없이 왜소해지겠지만 무상하기에 영원할 수 있다는 역설의 깨달음도 얻는다. 어차피 우리는 갖가지 사연을 안고 여기에 왔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기에 말이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온통 고만고만한 현실에서 거의 이 천 년을 훌쩍 뛰어 가슴 뜨거운 사나이와 대화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자신의 이상대로, 자기의 기준으로 당당하게 살다간 맹자라는 인물과의 만남을 통해 나도 이 힘든 세파를 살면서 좁아진 가슴을 펴고, 고개를 들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조금이나마 얻은 보람이 있다.

 

유난히 춥고 긴 겨울의 끝을 알리는 봄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다. 곧 봄의 시작을 알리는 매화가 필 것이다. 그 꽃은 겨울의 모진 한파를 이겨낸 기쁨의 표현이자, 봄이 왔으니 기지개를 켜라는 선언문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