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커피의 마음을 읽다

비들목 2020. 2. 21. 13:42

커피의 마음을 읽다

저 까맣고 조그마한 것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늘 일상이 가져다주는 여유의 품안에서 입과 코, 눈으로 가까이 하면서도 수수께끼마냥 모르는 부분이 까만 원두 색깔만큼이나 막연한 호기심으로 칠해져 있었다.

 

체리빛깔 열매에서 달콤한 속살을 헤치고 드러난 씨앗은 생두라는 이름을 달고 국경을 건너고 사람들의 손을 거쳐 오면서 부풀어진 사연들만큼이나 연두색 회색 옅은 밤색으로 모양과 색깔이 조금씩 다르다. 생두는 200도 이상 뜨거운 화기를 견뎌내야 하는 담금질을 거치면 밤색 비슷한 색깔로 몸을 탈바꿈한다. 드디어 타닥타닥하는 소리와 함께 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내피마저 벗어버리면 자기 몸을 내어주기 위한 통과의례는 끝난다. 며칠간의 묵언수행과도 같은 숙성을 끝내고 나면 원두라는 이름으로 세상으로 흘러와 긴 여행을 마무리 한다. 이윽고 인간들이 특별히 고안한 기계에 들어가 가루로 산산이 부서지면서도 아프다는 마음 한번 냄이 없이 모든 것을 준다. 뜨거운 물로 몸을 씻는 정화과정을 거쳐 한 방울 두 방울 토해낸 물은 와인 색깔에서 연한 노란빛깔 어두운 색까지 참 다양한 색깔로 샘물을 이룬다.

 

그 샘물은 인간사이의 빈틈을 비집고 흘러가 목마른 사람들의 가슴속에 고여 있는 감정을 쓸어내려주고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거나 생채기 난 마음에 위로를 건네주는 향연을 베푼다.

 

커피 맛은 단맛 신맛 쓴맛이 어우러진 맛의 조화라고 하지만 맛조차도 이게 무슨 맛인지 꼭 찍어서 표현할 수 없다. 품종 따라 가진 맛에다가 볶아지는 온도와 찰나의 손맛 따라 맛과 향에서 미묘하게 차이가 난다. 내 입에 닿기 전 품어내는 향기는 초클릿 향, 느끼한 프림 향, 구수한 누룽지 향, 때론 암모니아 냄새도 있다. 그렇게 커피는 아프리카 중남미 동남아시아에서 재배돼 여러 사람의 손길을 거치면서 이야기를 입히고 소문으로 덧칠해지면서 말의 성찬과 함께 맛과 향, 분위기로 세상에 흐르고 있다. 아니 커피는 우리의 마음과 삶속에 깊숙이 파고 들어와 우리의 마음과 관계를 소통시키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우리가 매일 겪는 삶이라는 항해에서 일어나는 달콤하고 씁쓰레하고 시큼하고 슬프고 아린 감정의 바다는 끊임없는 물결을 일으킨다. 우리는 위로받고 위로하면서 감정의 바다를 헤쳐 나가야 한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 숨어 있는 감정을 커피의 씁쓰레하고 시고 단맛으로 흘러내리게 하는 시간이 없다면 나와 나, 나와 타인과의 관계는 북적거리는 도시에서 삭막한 사막을 홀로 걷는 느낌일지 모른다.

 

모닝커피로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커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한 잔의 입맞춤을 통해 세상사에 낚이는 허허로운 마음을 달랜다. 늘 오고가는 길에서 불현 듯 나만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 커피가 있는 곳으로 간다. 그것은 나만의 위로가 필요하다는 떨림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언젠가 기계적으로 찍어내는 커피가 아닌 나만의 향기와 맛을 내는 커피로 나에게 전해지는 감정의 깊이를 읽어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핸드드립으로 추출한 커피는 또 다른 맛과 향을 주는 선물이었다.

 

커피. 처음 커피를 마셨을 때 너무나 쓰디썼다. 이런 것을 왜 먹을까 할 정도였다. 90년 초 미국에 갔을 때 그 사람들이 한 번에 먹는 커피의 양에 놀랐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맛본 아메리카노의 맛은 약간 쓴 맛이었지만 옅은 누룽지 맛이었다. 쓴맛과 단맛의 조화를 계량화시킨 커피믹스를 마실 때의 달달함은 일상에서 행복한 느낌을 주었지만 어떤 날은 감기몸살같은 야릇한 증세를 일으키곤 해 가까이하기 어려운 때도 있었다. 세상에 낚이고 커피에 점점 몸이 무디어져 믹스커피는 어느새 고달픈 하루를 시작하고 지친 몸을 위로하는 활력소가 되었다. 무엇보다 믹스커피는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달콤한 매개체였다. 어느 해 건강검진에서 혈당에 대한 적신호가 켜졌다. 그날부터 아메리카노로 바꾸어 마신 지도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이제 아메리카노는 하루에 두어 번은 마셔야 되는 음료수가 되었다. 이것이 주는 향기가 좋고 이것이 주는 분위기가 좋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다. 어떤 날은 무리를 떠나 나와 일대일로 대면하게 해주어서 좋고 공부를 하거나 글쓰기를 할 때도 좋다. 무엇보다 글은 사람들이 사연을 안고 들락거리는 커피숍에서 써야 제격이다.

 

커피를 느끼면 관계가 느껴진다. 꼭 만나서 만나는 만남이 아니라 커피의 맛과 향기 속에 버무려진 관계다. 무엇보다 커피는 세상 속에 묻혀 세상을 벗어나고 싶고 내 속에 숨어있는 고독을 불러오고 싶을 때 나와 내 마음을 엮어주는 중매쟁이가 된다.

 

어느 날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커피숍에서 커피 속에 숨어있는 바다를 끄집어내 인생의 숨결을 느낄 수도 있고 커피를 벗 삼아 꼬불꼬불한 인생길에서 여유와 향기를 느끼며 천천히 걸어갈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커피에서 아무런 감정이 올라오지 않을 때, 인생의 비애와 이생에서의 인연을 놓아버릴 인연의 끝에 도달했다고 느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