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인생의 오후

비들목 2020. 2. 29. 11:04

인생의 오후

어느 날 새벽, 불현듯 잠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순간 그림자처럼 자리에 앉아 있는 또 하나의 나를 떠올리게 되었다. 어둠 속에 우두커니 홀로 있는 외로운 노인의 환영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숙명임에도 처음으로 인생의 오후를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너무나 생생하게 다가왔다.

 

좀 더 나이가 들어 육체와 정신의 기능이 쇠약해질 때 어떤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중년의 끝자락에 이르러, 앞으로 마주하게 될 외롭고, 늙고, 병들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먼 훗날의 일이 아님을 자각하게 되었다. 아직 때 이른 생각일지 모르지만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육체는 어쩔 수 없이 허물어지더라도 정신만은 성성한 상태로 버텨내고 싶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면서도 늘 어떻게 삶을 이끌어갈까 골몰하다가 처음으로 삶 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힐끗 보게 된 계기였다.

 

나이가 들어감은 몸의 사소한 변화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몸의 불수의근이야 세월 따라 변해가니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문제는 수의근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게는 눈에서 두드러지게 세월의 흔적이 나타난다. 조금만 오래 책을 보고 있으면 눈이 뻑뻑해지고 시야가 흐려진다. 오후쯤 되면 책을 보기가 싫을 정도다. 고관절은 옆으로 벌어지는 각도가 줄어들었고, 서서 몸을 아래로 굽히면 팔은 땅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모두 조금씩 몸이 굳으면서 신체 활동영역이 줄어들고 있다는 증거다. 무엇보다 나이를 먹어 간다는 가장 큰 변화는 식욕과 색욕에서 나타난다. 동물인 이상 식욕과 색욕은 생의 끝까지 가는 큰 욕구일 텐데 점점 줄어들고 있어 간혹 걱정스러울 때도 있다.

 

몸의 자율신경이 감소되어 가는 현상과 비례해 마음까지 나이를 의식해 스스로 한계를 그어버리는 일도 많다. 아직은 그럭저럭 특별히 아픈 데가 없지만 건강이란 게 인과와 우연의 시소게임인 듯해 몸에 병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욕심이라는 걸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동안 나이를 의식하기 전에는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일들이 많았다. 어느 해부터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사소한 일상의 움직임에서 미묘한 변화가 느껴졌다. 주차할 때 한 번에 똑바로 하지 못해 몇 번이나 앞뒤로 왔다 갔다 한다. 새로운 전자기기의 사용법을 익히려고 해도 사용설명서의 글자가 너무 작아 미리부터 겁을 먹는다. 옛말에 나이 들어 머리에는 나라를 다스릴 온갖 방책이 가득하지만 집을 나서면 넘어질까 두려워 전전긍긍한다는 말이 있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역시 세상은 젊음에서 나오는 생각의 넓이와 크기로 판을 벌려서 행동하고 변화시켜 가는 무대이지, 나이의 숫자로 할 수 있는 무대가 아님을 점점 실감한다.

 

사람을 만나는 폭이 좁아진다. 굳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고 만남에서 오는 생각의 불일치를 해결하려고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이런 생각에 스스로 인연의 울타리를 긋는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더라도 과도한 액션영화나 스릴러, 지나치게 감정을 뒤흔드는 멜로물은 보고 싶지 않다. 노래도 클래식이 좋아지기도 하고 잔잔한 멜로디가 좋다. 가끔 7080 노래를 들으면 답답한 가슴이 풀어질 때도 있다.

 

나이를 먹어 좋은 점은 세상을 좀 초연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인생이 원래 그런 것이고 지은 대로 받는 무대임을 안다. 비바람이 무섭게 몰아치더라도 조만간 그칠 현상임을 알기에 하늘을 탓하지 않는다. 뉴스를 보는 중에 기막힌 불행을 당한 사람들의 절망감에 가슴 아파하면서도 이내 소소한 일상으로 관심을 옮긴다. 호기심은 사소한 데로 옮겨간다. 위로만 쳐다보지 않게 되니 주변에서 쉽게 보는 것들에서 쏠쏠한 재미를 찾기도 한다. 예전에 누리지 못했던 행복이다.

 

어느 날 혼자서 길을 걷다가 문득 느껴지는 커피 향기, 우연히 코끝을 스치는 꽃향기, 조그마한 실개천 위에서 노는 오리 떼들, 산 위에서 보는 낙조, 구름 사이로 비쳐지는 달, 길가에 말없이 피어있는 이름 모를 꽃. 이처럼 예전에는 감정을 주고받지 않았던 사물들이, 새롭게 살아나는 나의 감성의 그물 안에 낚인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육체의 근육은 줄어들지만 감정을 조절하는 정신적 근육은 더 단단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몰입하거나 간절한 열망이 줄어드는 만큼 관조의 힘이 생겨나 사람관계에서 부딪히는 마음을 내려놓기가 쉽다. 세상을 살아감에 생기는 문제는 결국 감정의 문제다. 누군가는 감정을 무지개 빛깔처럼 구분하여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이라는 일곱 가지 색깔로 구분했다. 결국 삶이란 이 감정들이 시계추와 같이 왔다 갔다 하면서 정지해가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어느 때부터인가 칠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감정에 매몰되는 시간과 횟수가 짧아져 간다고 느껴졌다.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짐도 담담히 받아들인다. 만남과 떠남의 의미를 가볍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남은 시간의 잔고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에 굳이 힘든 감정을 가진 채 살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오는 사람은 맞이하고, 가는 사람은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때가 되었으니 나도 가고 너도 떠나가는 거구나 라고 받아들인다. 인연이 끝났을 때 밀려오는 비애나 후회가 없어서가 아니라 삭혀서 버리는 연습이 인생이란 걸 알기에 그렇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밥값을 했을까. 내가 가진 거라곤 화석 같은 경험과 몇 조각의 지식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내가 할 수 있고 나에게 의미를 주는 일이라면, 어두운 밤하늘에 순간 빛이 났다가 사라지는 반딧불이면 어떠한가. 그런 인연을 만나지 못하게 될지라도 자신을 방종하지 않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어느 날 인생의 오후가 끝나고 저녁이 되어 옷을 벗으라는 신호가 올 것이다. 그때가 언제이든 오롯한 정신으로 담담하게 인생의 오후를 맞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