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대통의 뜻은

비들목 2020. 3. 17. 15:05

대통의 뜻은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을 넘었다. 60 평생, 보고 듣고 말하는 과정에서 허물이 꽤나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귀로 들려오는 소리에 가급적 일희일비 하지 않으려고 작정한다. 웬걸. 성인과의 거리는 너무나 멀기에 여전히 보고 듣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해 하루에도 몇 번씩 심사가 틀어진다.

 

국민의 감정이 이렇게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워진 적이 있었을까. 잠시 지나온 날들이 기억창고의 문틈을 비집고 나온다. 가난이다. 요즘 세대에서는 생각으로도 알 수 없는 가난이었다. 초등학교 시절까지 가난과 배고픔을 늘 달고 살았던 것 같다. 가을걷이가 끝나도 먹을 것이 부족해 동네 근처의 묘소에서 시제(時祭)를 지내는 날짜를 손꼽아 기다렸다. 겨우 떡 한 조각 얻어먹을 수 있는 것인데 말이다. 동네에서 제사를 모시고 난 다음에는 제사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이 미덕이었다. 음식이 언제 오나 하고 잠도 자지 않고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하루 세 끼를 먹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가능했던 일은 오직 잘 살아보세라는 욕망을 일으킨 대통(大統)이 있었다. 물론 발전의 뒤에는 어두움의 그림자도 짙게 드리웠다. 볼 권리, 알 권리, 표현할 권리와 같은 자유가 성장의 논리에 밀려 제한되었다. 그래도 그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국가라는 자각이 일어났다. 이후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그들의 대통은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억압적이었지만 국민의 소리에 아예 눈을 감지는 않았다. 경제안정과 북방외교에서는 나름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산업화의 세력을 디딤돌로 탄생한 민주화의 대통들은 요란스러움에 비해 과일을 따 먹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국민의 마음만은 읽었다. 그 뒤를 이은 대통들은 장점과 단점이 서로 물고 무는 정도였다.

 

촛불의 광풍을 타고 정권을 잡은 대통은 촛불이라는 구호 아래 화려한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쇼에 취하고 난 뒤 뒤돌아보니 그 쇼는 어둠을 밝히려고 했던 촛불이 아니라 분노에 타오르는 화염이었다. 조금 오래된 미래를 불쏘시개로 써서 미래를 태우고 있었다. 그 사이 국민감정은 반쯤 타다 꺼진 나무처럼 흑백으로 나누어졌다.

 

국민의 목소리는 사이버 공간에 세운 각자의 진지의 함성으로 바뀌었다. 갈등과 분열은 성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해자처럼 깊고 넓었다. 이성의 합리성은 뒷전으로 밀려났고 편당을 가르는 논리만 눈사태처럼 번졌다. 국민감정의 골은 점점 깊어만 가는데도 대통은 한쪽 귀로만 보고 한쪽 귀로만 듣는 듯했다. 윗사람이 좋아함과 싫어함을 살짝만 드러내도 아랫사람은 그보다 몇 배 더 심하게 나타낸다는 옛말이 있다, 그러니 조국사건, 울산시장 선거개입 같은 의구심이나 방역실패에 대해 그 편의 누구에게서도 수치스러워하거나 일말의 미안해하는 마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점점 곳곳에서 홍위병 그림자가 비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공영방송을 떠나 유튜브로 몰려들었다. 대통은 자기편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사람처럼 보였다.

 

대통의 성향을 알아낸 영합꾼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소음과 부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급기야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덮쳤다. 사람들이 감염되고 죽어가고 있는데도 방역의 실패가 아니라 시장이나 도지사를 잘못 뽑아서 그렇다는 중세 마녀사냥할 때나 있을 법한 말까지 나왔다. 그것도 꽤 유명세를 뽐내고 있는 여류소설가의 입으로 말이다. 무엇이 그녀를 마녀사냥의 심판관으로 만들었을까. 자기 안의 생각을 성찰하지 못하고 생각의 프레임에 갇혀 내 편이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 배출했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무당의 소리는 일대일의 관계지만 그녀가 낸 소리는 다른 편을 악령으로 겨냥한 주문이었다.

 

일이 일어날 조짐을 알고 양쪽의 단서를 다 살펴서 대처해야 함은 대통에 요구되는 책무다. 그런데도 코로나19의 사태에서 보는 것처럼 늘 보고 싶고 듣고 싶은 쪽으로만 듣다가 엄청난 손실을 초래했다. 게다가 국민이 죽어 나가고 경제에 먹구름이 밀려오고 역병이 곳곳에서 창궐할 조짐이 보이는 시점에도 기생충 제작자들을 불러 구중궁궐에서 폭소파티를 열었다. 참으로 그 장면을 보는 우리가 민망할 정도였다. 아무리 예능시대라고 하지만 대통의 자리는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자리이다. 자기의 신념만 따르고 그저 쇼 정도 하는 것으로 그 자리의 가치를 알고 있다면 그런 사람을 대통으로 부를 수가 있을까. 대통이란 크게 통합하는 뜻이다. 내 편만 믿고 내 편에 뜻에만 부합하는 사람이 대통의 큰 그릇에 담길 수가 있을까.

 

기어코 봄이 왔다. 따듯한 햇살이 온 천지에 퍼지는 봄이 왔건만 마음은 왜 이리도 무겁고 아플까. 나와 대통과의 심리적 거리는 처음부터 이렇게 멀어 떨어져 있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