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란 말이 갈대처럼 뇌리에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미증유의 코로나 역병이 휩쓸면서 가장 효과가 있는 예방법 중의 하나가 거리두기이다. 과학적인 근거에 따라 행한 것이겠지만 거리두기를 하는 만큼 마음의 거리도 늘어났다. 모든 사물 사이에는 거리가 놓여있다. 거리에 따라 서로 주고받는 힘이 다르듯이 거리는 세상이 존재하는 한 있을 수밖에 없다. 고전물리학의 만유인력 법칙에 따르면 물체 사이에 끌어당기는 힘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사물만 그런 게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이 법칙이 엇비슷하게 작용하는 듯하다. 인간관계에서는 서로의 거리에 따라 가깝고 먼 마음의 상태가 정해진다. 마음의 거리에는 처세에 따른 권력의 거리, 남녀 사이 애정의 거리, 친구 사이 우정의 거리, 가족 간의 애증의 거리 등 다양한 유형의 거리가 있다. 사람 사이의 인연은 서로의 거리를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현악기의 줄들이 적당한 거리에서 조율되어야 아름다운 선율이 나오듯, 사회 구성원들의 상호작용하는 힘으로 다양한 삶의 무늬가 짜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마다 살아오면서 서로의 가깝고 먼 심리적 거리를 재는 자기만의 방식이 있다. 이는 다차원방정식과 같다. 거기에는 세상을 살면서 터득한 인생철학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 식을 풀어 살맛 나는 인생길을 가기 위해서는 과거, 현재, 미래까지 고려된 많은 요소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저 사람이 저럴 리가 없는데 실망하거나 애꿎게 그 사람의 인격을 탓하기도 한다.

누구나 자기만의 프리즘으로 바라보기에 세상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대부분 상식적인 바탕 위에서 굴러간다.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많은 어긋남은 서로의 거리를 재는 방정식의 변수들, 즉 의리와 이해에 대한 가중치 배분이 서로 달라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살다 보면 생각지도 못하게 그 사람의 본심을 읽게 되는 일이 있다. 평소 살갑다고 느낀 사람한테서 서운한 마음을 느끼는 순간이다. 내가 많이 주어 기대했는데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즉 바라보는 기대치가 서로 다른 것이다. 이처럼 거리를 재는 방식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 아니 앞으로 살아갈 인생까지 통째로 담겨있는 듯하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면 주관적 감정에 휘둘려 쩔쩔매기보다 객관적으로 거리의 척도를 재는 방식을 살펴보아야 한다. 인간관계에 얽히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방법은 타인의 마음 씀씀이에 휘둘리지 않는 자신만의 '거리 척도법'을 만드는 일이다.

사람 사이 거리의 척도를 알면 그 사람의 뒷모습을 읽을 수 있다. 세상은 숨 가쁘게 돌아가지만 그럴수록 누군가와의 거리의 설정은 더욱 중요해진다. 가까운 인연을 잃지 않도록 서운해하지 않을 적당한 거리를 찾아야 한다. 거리의 척도법에는 한 사람의 가치관이 녹아 있겠지만 세월 따라 변해간다. 그러므로 인생의 단계마다 척도법도 걸맞게 조정되어야 한다.

유튜브, 컴퓨터 운영체제, 카카오톡 등 수시로 업데이트를 요구하는 메시지가 뜬다. 세상의 속도가 그만큼 빨라지고 불확실성이 많다는 징표이다. 마찬가지로 복잡한 인생의 단계에서도 인간관계에 대한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이왕이면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쪽으로 업데이트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세상을 욕계라고 한다. 욕망이나 욕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비유한 말일 테다. 우리 마음 곳곳에 희망이란 이름으로 너절너절 붙어 있는 욕심을 줄여보면 어떨까. 욕망이란 끝이 없기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지포스 왕의 바위'처럼 이룰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맹자 진심편'에 '마음 수양은 욕심을 줄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는 말이 있다. 욕심의 크기를 줄일수록 사람 관계에서 기대하는 거리는 적당한 거리로 조율되어 좀 더 조화로운 세상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임인년 새해가 밝았다. 코로나로 멀어진 공간적 거리가 다시 숨소리가 들리는 일상의 거리로 회복되었으면. 세대·성별·이념의 갈등으로 우리 사이에 크레바스처럼 벌어진 심리적 거리가 다시 대화 가능한 거리로 돌아갔으면. 거리의 척도법을 업데이트하여 함께 살고 싶은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중도일보 풍경소리에 기고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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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진에서 만난 겨울의 동해는 온통 차디찰 정도의 흰빛의 일렁거림이었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바람 따라 파도는 집채만한 크기로 하얀 너울을 쉼 없이 퍼트리고 있었다. 포말과 함께 물보라는 먹이 사냥을 마친 사자가 거친 숨을 뱉어내듯 헉헉거렸다. 파도는 무법자라도 된 듯 모든 소리를 삼키고 있었다.

파도가 포말이 되어 산산이 부서지듯이 인생도 언젠가는 부서져 흩어져야 한다. 부서져야 다음의 파도가 또 와서 부서지면서 바다는 약동하는 존재로 생생하는 것이다. 인생은 파도가 물 위에 순간 일렁거린 것처럼 잠시 왔다가 가는 것일 뿐이다. 세월의 무상함을 뭐라고 말할 것인가. 잠시 파도처럼 물 위에 부유하는 삶에 지나지 않는 존재인걸.

새해다.

무슨 거창한 말이 필요하겠는가. 노자의 實其腹 强其骨이란 말처럼 살아있는 몸에 관심을 기울이는 해가 되었으면.

임인년 인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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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충時蟲  비들목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아득한 저 허공중에 우리 은하계가 있다. 그 어느 한 모퉁이에 태양계가 있고 태양이 거느린 별들 가운데 우리의 지구도 있다. 지구 이웃의 별인 금성과 화성은 이름은 아름답지만 사실 지옥과도 같은 기후환경을 가지고 있다. 밤낮의 온도차이가 몇 백도에 이르니 생명체가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이다. 그런 별들 사이에 묘하게 끼어있는 지구에서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기후환경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태초의 지구에서 무생물과 유생물의 틈새를 비집고 탄생한 생명은 무수한 진화의 갈래를 엮어서 약동하는 생태계로 엮어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게다가 만물 중의 으뜸인 사람이 태어났다는 것은 기적이라는 말로서도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적적이다. 이와 같은 지구에서 눈, , , , 몸을 가지고 생각하는 한 인간으로 내가 있다는 것은 우주의 일대사 인연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우주의 크기로 보면 존재한다고 볼 수도 없는 인간이 언어를 만들고 감각과 지각작용에 의한 지식으로 현상 속에 숨어있는 원리를 추상화시키는 능력을 깨워 인류문명의 발전을 이루고 있다. 이제는 물질의 안으로 들어가 원자 속 우주의 속살을 파헤치고, 태양계를 벗어나 우주의 신비까지 한 꺼풀씩 벗겨내는 위대한 여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경이로운 것은 물질의 차원을 넘어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보이는 모든 것은 나의 마음, 너의 마음, 각자의 마음이 인연으로 엮어진 생명의 그물망에 잠시 피어난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마음을 가진 인간이 우리가 만든 사회라는 그물 속에서 헤매다 인간관계 속에 매몰된 채 자기의 고유한 마음을 피워내 보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이 지구와의 인연을 끝내고 떠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나에게 주어진 짧은 시공간 속에서 나의 삶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불타는 깨달음으로써, 공자는 호학으로써, 노자는 도로써 자기의 인연을 다하였다. 중생에 머무르고 있는 나는 그들이 남긴 마음을 어떻게 더듬어 볼 것인가. 오늘도 침침한 눈으로 글자를 쳐다보지만, 업장에 막혀 시간만 헛되이 먹어가는 시충時蟲의 신세. 그래도 가고, 가고 또 가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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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향수 100리 길을 타다

 

비들목

모처럼 페달을 밟기에 날씨가 좋았다. ‘향수의 탄생지가 있는 옥천읍 정지용 생가를 끼고 좌측으로 돌아 대청호를 끼면서 상류로 올라가 금강소수력발전소댐을 건너 처음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오는 옥천향수100리길 라이딩이다.

 

‘4인의 자타세들은 옥천군 운동장에서 출발하여 옥천읍을 천천히 둘러보며 보은으로 가는 옛길을 따라갔다. 이내 멀리서 대청호를 안고 페달을 밟아나갔다. 한 시간쯤 갔을까 생각하는데 어제부터 계속된 두통이 가라앉지 않고 몸이 가라앉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때마침 휴식하는 시간을 가졌다. 잠깐의 쉼으로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한편으로는 오늘 완주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일어났지만 갈 수 있는 만큼 가겠다는 의지를 속으로 새겨넣었다. 도로 구간을 벗어나 대청호를 끼고 진입하니 사면에 데크로 길을 만들어 놓아 편안했다. 더 깊숙이 저수지 안으로 들어가니 비포장도로 구간이 군데군데 있어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듯 한적한 길인데도 가는 길 곳곳에 낚시터가 있었다, 상수원 보호구역일 텐데 비닐봉지에 든 쓰레기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어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옛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몸가짐을 삼간다고 했는데, 그냥 함부로 버리는 쓰레기의 양만큼이나 치워야 할 마음의 쓰레기도 많은 세상인 것 같다.

 

향수길 가는 길은 표지판이 잘 설치되어 있었지만, 갈림길에서 헷갈리는 일도 있었다. 이런 길의 표지판을 설치할 때에는 실무자들이 자전거를 타거나 걸으면서 이용자의 눈으로 표지판을 붙이면 더 좋을 것 같았다. 대청호에 한반도 모습을 그려놓은 곳이 소재하는 안남면을 지나, 금강이 잘 보이는 길로 접어드니 이쁜 집들이 듬성듬성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간혹 판다고 내놓은 집도 눈에 띄었다. 처음 이곳에 집을 지어 들어올 때의 마음과 떠나려고 하는 마음의 사이에는 어떤 곡절이 놓여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하지만 인생은 흘러가는 구름과도 같기에, 집이라도 인연만큼 머무르다 가는 것이려니 생각하고 페달을 밟아나갔다.

 

100리길 중간 정도에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가 나타났다. 휴게소 건너편 주막에서 막걸리 한 잔으로 가쁜 목을 추여 보았다. 금강소수력발전소댐에 난 길로 처음으로 금강을 건너갔다. 아직은 물에 들어가면 추울 텐데 벌써 수상스포츠를 즐기려는 젊은이들이 있다. 금강을 뒤로 밀어두고 지방도로를 따라 달려나갔다. 옥천읍을 앞두고 나지막한 고갯길이 꽤 길게 펼쳐져 있었다. 마지막 힘까지 모아서 페달을 저어가니 거의 입에서 짠 물이 올라올 무렵 언덕길에 올랐다. 시원하게 바람을 맞으며 내려가는 길에 육영수 생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궐 같은 집은 코로나 사태로 굳게 닫혀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시절에는 참 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렸는데 왠지 창살 없는 감옥처럼 쓸쓸함과 고독함이 묻어나는 듯했다.

 

아침 930분부터 라이딩을 했으니 허기가 배를 비집고 올라왔다. 정지용 생가 인근에 도토리묵을 직접 만들어 파는 맛집이 있다는 대장의 말에 이끌렸다. 걸려있는 메뉴판에는 최고로 맛있는 묵집이라고 자신 있게 홍보하고 있다. 묵수제비와 묵부침에 막걸리가 더해졌다. 앙증맞고 두툼한 사발에 담긴 막걸리는 목 넘김이 부드럽고 묵수제비도 다른 데서 먹어보지 못한 맛이었다.

 

불룩 튀어나온 배를 친구삼아 정지용 생가에 들렸다. 소담한 초가집인 그곳에서 문학소녀의 꿈을 아직도 꾸고 있을지 모를 중년의 여인들이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는 바로 옆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라이딩의 피로를 씻어 보내면서 무상한 세월의 흔적을 비워나갔다.

 

오늘의 라이딩 거리는 약 55km, 시간은 어느덧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옥천향수 백리길은 도시에 흐르는 하전을 따라 잘 꾸며진 자전거길과는 달리 향수를 품고 있었다. 공기가 상큼했고 대청호를 끼고 금강을 보듬으면서 야생의 푸르름으로 무뎌진 동심을 불러 깨웠다. 우리는 가을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저 말 없는 허공에 던지고 잿빛 하늘의 도시로 스며들 듯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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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하지 않는 신혼여행

 

코로나19 역병이 온 천지를 휘집고 다닌 지도 벌써 3개월이 되어 갔다. 많은 사람이 전염되었고 이승으로 떠났다는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사라졌다는 뉴스가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공포에 짓눌러지기 시작했다. 사람끼리 내쉬는 숨을 통해 전파되다 보니 모임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생활은 제한되었다. 어쩔 수 없는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는 등 사회에서 거리 두기가 이루어졌다.

 

계절은 봄인데도 봄이 와 있는지조차 느낄 수 없었다.

 

작년에 정해진 작은 아들의 결혼식 행사는 우여곡절 속에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결혼식을 알리는 쪽의 조심스러움만큼이나 소식을 듣는 쪽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피를 나눈 일가친척도 참석을 꺼리는 상황에서 누군들 참여하고 싶겠는가. 나이 많은 형제들한테 오지 말라고 하니 덩달아 젊은 조카들까지도 당연히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줄 여겼다.

 

조촐한 결혼식이 열렸다. 마스크를 쓰고 나타나는 축하객을 보니 마치 조난되었다가 구조대를 만난 듯했다. 저 마스크를 쓴 모습 뒤에는 복잡미묘한 감정이 숨어 있을 것이다. 다들 드러내지 않는 걱정을 숨긴 채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결혼식 풍경이 벌어졌다. 단지 마스크를 벗지 않는 모습만 다를 뿐이었다. 조용한 결혼식이었다. 식이 끝날 즈음 신랑·신부가 우인들과 사진을 찍는 순서에 뜻밖에도 젊은이들이 우루루 쏟아져나와 잠깐이나마 분위기가 지펴졌다.

 

자연스레 폐백은 생략되었기에 결혼식은 끝이 났다. 스페인으로 신혼여행을 잡았던 신랑·신부의 신혼여행은 이미 취소되었다. 바로 일상생활로 들어갔다. 일주일의 뜸을 들인 후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진주에 있는 할아버지·할머니 산소에 다녀오자고 하였다. 가는 길에 외할아버지·외할머니 산소도 있으니 자연히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할아버지·할머니는 절에 모시고 있기에 먼저 부처님 앞에 삼배를 드리고 나서 영탑에 가서 인사를 드렸다. 아내가 아버님·어머님 사랑했던 손자가 아내와 함께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하고 고했다. 탑돌이를 마치고 두 분의 극락왕생을 바라는 기도에 아들 부부의 행복을 담았다.

 

진주하면 촉석루, 진주냉면, 진양호의 이름이 먼저 생각난다. 가벼운 요기라도 할 겸 냉면으로 유명한 하연옥에 갔다. 비빔냉면과 물냉면 그리고 육전을 주문했다. 진주에서 음식을 처음 먹어본다는 둘째 며느리는 진주냉면의 이야기에 살포시 즐거워했다. 거기에 육전까지 더하니 다들 배는 빵빵해졌다. 늘어난 배를 달래기 위해 촉석루로 갔다. 촉석루가 있는 진주성은 남강과 어우러져 우리나라 시내에 있는 성 중에서 가장 멋스럽다. 촉석루는 남강을 품에 안을 수 있기에 무수한 문인들의 글이 있고, 임진왜란 영욕의 역사가 묻어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진주성은 임진왜란과 때려고 해야 땔 수가 없다. 김시민 장군의 진주성 대첩이 있었지만 제2차 전투에서는 처절한 패배를 당했다. 그 피의 아픔을 딛고 논개라는 여인이 남강에 한 떨기 붉은 꽃으로 떨어졌다. 그 강물은 돌고 돌아 우리네 가슴속으로 들어와 역사의 꽃을 피워내고 있다.

 

아들 내외는 성곽 아래로 나가 논개가 뛰어내렸다는 의암바위에 올라 역사의 아픔을 뒤로한 채 사랑의 포즈를 취한다. 바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이겠지만 그저 세월의 무심함만 탓할 뿐이다.

 

영남 제일의 누각인 촉석루에 오른다. 앞에는 사방이 탁 트일 정도로 나지막한 산세가 펼쳐져 있고 그 사이로 넓은 남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시인 묵객이라면 시 한 줄은 절로 나올 만하다. 단지 6.25전쟁 때 불타버린 것을 1960년도에 복구하면서 옛날의 고즈넉한 맛은 좀 빛바래진 것 같다. 신랑·신부는 바로 옆에 있는 논개를 기리는 수지문(水指門)으로 들어갔다. 임을 향한 일편단심을 담은 강물을 가리키는 문이라는 뜻이겠지만 이제는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가리킴이 되었다.

 

강변을 따라 길게 뻗어 있는 성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천천히 파릇파릇 연초록빛을 피우고 있는 나무에서 품어내는 봄기운을 느끼면서 걸어갔다. 서장대를 지나 북장대를 가는 중인데 북장대에 거의 이르렀을 무렵 서산으로 해가 막 넘어갈 참이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해가 완전히 넘어갈 때까지 우리는 노을을 쳐다보았다. 성과 나무를 벗 삼아 아름답게 지는 낙조의 풍경이었다. 여명을 끼고 처음 왔던 곳으로 여유로운 걸음으로 내려갔다. 아들 내외도 오늘처럼 편안히 인생길을 걷고 서산으로 아름답게 지는 해처럼 되기를.

 

진주성을 나오니 어둑어둑해졌다. 진양호를 보기 위해 남강댐으로 갔다. 남강댐홍보관 앞에 있는 전망대에 섰다. 길게 뻗은 남강댐 아래로 진주시가 화려한 불빛을 뽐내고 있고 호수 건너편에는 야리야리한 진양호 유원지의 불빛이 밤의 운치를 더한다.

 

진주를 떠나 대전으로 올라가면서 아들 내외에게 여행의 맛이 어떻냐고 물어보았다. 얼굴에서 편안한 미소가 흐르면서 신혼여행 같은 느낌이라고 하였다.

 

통영·대전 고속도로를 타고 가는데 금산을 지나 인삼랜드휴게소를 불과 3km를 남겨둔 시점에서 갑자기 계기판에 엔진점검 신호가 켜졌다. 그러고 보니 차도 약간 이상한 듯했다. 속도가 나지 않았다. 금산 휴게소에 들어서니 차가 웅웅 떨리는 듯했다. 시동을 끄고 본네트를 열어봐도 별 이상이 없었다. 다시 시동을 걸어보니 아예 시동이 걸리지 않는데 타는 냄새가 났다. 수리를 받아오던 서비스센타 지인에게 연락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보험사에 연락해 견인차를 불렀다. 나는 견인차를 타고 나머지 식구는 택시를 불러서 따로 대전으로 출발했다.

 

며칠 후 수리회사에 갔더니 타이밍밸트를 보여주는데 고무줄처럼 가느다란 상태로 끊어져 있었다. 밸트 부속품인 베어링이 하나도 없다고 하면서 그동안 이상 신호를 느끼지 못했느냐고 한심한 듯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조상님의 은덕이 크다고 말했다. 고속도로에서 끊어졌으면 엔진이 깨지고 브레이크가 작동되지 않는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칫 대형사고가 일어날 뻔한 일이었다. 그냥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천운이었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30년의 무사고 운전기록이 끝날뻔한 일을 겪었다. 큰 액땜을 한 것 같다. 아들 내외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잘 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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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첫 라이딩

 

소한을 앞두고 며칠간 눈이 아닌 비가 촉촉이 내렸다. 절기는 소한을 지났으니 겨울의 절정을 향해 가건만 겨울답지 않게 추위가 사납지 않았다. 그래도 코끝을 스치는 바람은 여전히 겨울임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자전거 라이딩 제안을 하루 전날 받았다. 장비라곤 해봐야 달랑 한 달 전에 샀던 자전거가 전부였다. 아직 겨울이라 마음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색다른 경험이 될 것 같은 호기심이 불안감을 잠재웠다.

 

오늘 라이딩은 갑천 만년교에서 상류인 흑석리로 갔다가 산을 넘어 유등천 수계로 내려와 다시 갑천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초보자에게 거리와 속도는 가늠이 되지 않아서 몇 시간 정도 걸리느냐고 물었다. 10시 출발하면 오후 2시 정도 도착예정이라고 했다. 4시간 정도야 어떻게 하겠지 하는 자신감이 들었다.

 

오늘의 일행은 나를 포함해 진대장, 김동무, 류동무 네 명이다. 쌀쌀한 바람을 가로지르며 페달을 밟았다. 차가운 바람은 마음을 청량하게 만들었지만 점점 귀가 시려오고 콧물이 배여 나왔다. 자전거를 잠시 세워서 호주머니에 넣어 둔 워머로 목을 두르고 마스크로 입을 감싸니 조금 진정이 되었다. 갑천 우안도로 포장길이 끝나고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었다. 아뿔싸. 며칠 전에 내린 비가 언 땅 때문에 곳곳에서 물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자전거를 내렸다가 탔다가 다시 자전거를 들고 서릿발이 선 땅을 조심스레 밟으며 유격훈련처럼 험로를 헤쳐 나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길은 평탄한 길로 이어졌다.

 

다시 힘차게 바람을 가르며 달렸다. 진 대장은 페달을 밟는 위치, 자세, 앞바퀴와 뒷바퀴의 기어 변속에 대해 알려 주었지만, 듣는 귀와 왼손과 오른손의 기어변속은 따로 국밥이었다. 얼마쯤 가다가 갑천을 횡단해야 하는 지점에 도달했다. 잠수교 위로 물이 찰찰 넘치고 있었다. 다들 어안이 벙벙했다. 역시 대장은 대장, 힘차게 페달을 밟고서 지나갔다. 경력이 오랜 프로야 건널 수 있겠지만 초짜인 나와 경력이 일천한 두 사람은 페달을 밟을 용기가 나지 않아 물끄러미 시끄러운 물만 바라보았다. 이 때 건너편에서 우리보다 나이가 좀 더 많게 보이는 사람이 시골 자전거를 타고 겁 없이 물살을 가르며 우리 쪽으로 왔다. 머뭇거리고 있는 우리에게 천천히 쉬지 말고 건너야 한다고 말한다. 용기를 얻은 우리도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오직 앞만 보면서 자전거 바퀴로 물살을 밀치고 나아가니 온 몸의 감각기관을 타고 물의 저항이 느껴졌다. 신발 정도만 적신 채 다들 무사히 건넜고 다시 길을 향해 나아갔다. 조금 피곤이 올 무렵 휴식시간을 가졌다. 곶감과 밀감으로 에너지를 보충하고 진대장이 준비해 온 버너로 물을 끊여 밀크커피를 탔다. 따뜻한 커피는 차가운 속을 녹이며, 추위를 무릅쓰고 달려온 노력에 대한 위로인 듯했다.

 

자전거 라이딩은 일행 속에 있지만 나의 고독 속에 나아가야 하는 운동이고, 나만의 호흡이면서 일행과 호흡을 맞추면서 더불어 가야 하는 운동이다.

 

자전거 라이딩의 이점은 동네를 구석구석 돌아보기에 좋다는 것이다. 반환점 근방에서 한 때 벽화마을로 이름이 났던 정뱅이 마을을 둘러보았다. 이제는 벽화에 대한 관심이 시들했는지 벽화는 빛바랜 모습으로 낯선 이방인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동네를 쭉 둘러본 우리는 점심잠소인 흑석리역 쪽으로 갔다. 오늘의 점심은 추어탕이다. 막걸리 한 잔에 피곤이 싹 씻겨 내려간다. 자전거여행에서는 타지에서의 맛집 탐방도 서로의 화해를 돈독히 하는데 중요한 부분이다. 추위와 허기를 달랜 우리는 다시 페달을 밟았다. 산길 포장도로를 타고 이웃하고 있는 유등천 수계로 접어들었다.

 

처음부터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다급한 나머지 기어변속을 제대로 하지 못해 그만 기어가 빠져버렸다. 난감한 상황에 뒤따라오던 김 동무가 쉽게 고쳐주었다. 역시 경험은 사람을 지혜롭게 만드는가 보다. 힘으로 오르막길을 오르다 보니 기어에서 소리가 나면서 꽤나 힘들었다. 뒤따라오던 진대장이 기어변속이 잘못되었다고 한다. 오르막길을 오를 때 힘으로 억지로 올라가면 너무 힘들어 지치니 저속기어로 놓고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페달을 밟으라고 알려준다. 기어를 바꾸고 오르막과 리듬을 맞추면서 천천히 페달을 밟으니 꽤나 긴 오르막길도 쉼 없이 올라갈 수 있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힘들 때일수록 다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자기만의 리듬을 지키면서 느긋하게 헤쳐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목표에 도달할 것이다.

 

돌아가는 길은 수월하지만 차도로 가야하니 차량들에 신경이 쓰여 잔뜩 긴장하게 되었다. 시내구간에서는 차량이 내품는 매연까지 더하니 답답해졌다. 자전거 전용 GPS의 도움으로 수월하게 시내의 차도를 빠져 나갈 수 있었다. 다시 갑천변으로 접어들었고 처음 출발했던 반대쪽 둑방길로 나아갔다. 시원하게 쭉 뻗어있는 자전거 길을 힘주어 페달을 밞아 나갔지만 종아리는 점점 무거워져 가고 있었다.

 

목적지를 얼마 남겨놓지 않는 쉼터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오늘 자전거 라이딩 거리는 약 54km이란다. 시계는 이미 예정된 시간을 훌쩍 지나 3시 반을 가리키니 5시간 반이 걸렸다. 초짜인 나로서는 좀 벅찬 거리였지만 함께여서 첫 라이딩을 수월하게 마친 것 같았다.

 

인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동행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가는 길은 외롭거나 힘들지 않을 것이다. 엉덩이 쪽에서 조금 시큼함이 느껴졌다. 첫 자전거 라이딩의 증표일 것이다. 자전거 여행은 걷는 것과는 또 다르게 세상을 경험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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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의 뜻은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을 넘었다. 60 평생, 보고 듣고 말하는 과정에서 허물이 꽤나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귀로 들려오는 소리에 가급적 일희일비 하지 않으려고 작정한다. 웬걸. 성인과의 거리는 너무나 멀기에 여전히 보고 듣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해 하루에도 몇 번씩 심사가 틀어진다.

 

국민의 감정이 이렇게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워진 적이 있었을까. 잠시 지나온 날들이 기억창고의 문틈을 비집고 나온다. 가난이다. 요즘 세대에서는 생각으로도 알 수 없는 가난이었다. 초등학교 시절까지 가난과 배고픔을 늘 달고 살았던 것 같다. 가을걷이가 끝나도 먹을 것이 부족해 동네 근처의 묘소에서 시제(時祭)를 지내는 날짜를 손꼽아 기다렸다. 겨우 떡 한 조각 얻어먹을 수 있는 것인데 말이다. 동네에서 제사를 모시고 난 다음에는 제사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이 미덕이었다. 음식이 언제 오나 하고 잠도 자지 않고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하루 세 끼를 먹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가능했던 일은 오직 잘 살아보세라는 욕망을 일으킨 대통(大統)이 있었다. 물론 발전의 뒤에는 어두움의 그림자도 짙게 드리웠다. 볼 권리, 알 권리, 표현할 권리와 같은 자유가 성장의 논리에 밀려 제한되었다. 그래도 그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국가라는 자각이 일어났다. 이후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그들의 대통은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억압적이었지만 국민의 소리에 아예 눈을 감지는 않았다. 경제안정과 북방외교에서는 나름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산업화의 세력을 디딤돌로 탄생한 민주화의 대통들은 요란스러움에 비해 과일을 따 먹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국민의 마음만은 읽었다. 그 뒤를 이은 대통들은 장점과 단점이 서로 물고 무는 정도였다.

 

촛불의 광풍을 타고 정권을 잡은 대통은 촛불이라는 구호 아래 화려한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쇼에 취하고 난 뒤 뒤돌아보니 그 쇼는 어둠을 밝히려고 했던 촛불이 아니라 분노에 타오르는 화염이었다. 조금 오래된 미래를 불쏘시개로 써서 미래를 태우고 있었다. 그 사이 국민감정은 반쯤 타다 꺼진 나무처럼 흑백으로 나누어졌다.

 

국민의 목소리는 사이버 공간에 세운 각자의 진지의 함성으로 바뀌었다. 갈등과 분열은 성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해자처럼 깊고 넓었다. 이성의 합리성은 뒷전으로 밀려났고 편당을 가르는 논리만 눈사태처럼 번졌다. 국민감정의 골은 점점 깊어만 가는데도 대통은 한쪽 귀로만 보고 한쪽 귀로만 듣는 듯했다. 윗사람이 좋아함과 싫어함을 살짝만 드러내도 아랫사람은 그보다 몇 배 더 심하게 나타낸다는 옛말이 있다, 그러니 조국사건, 울산시장 선거개입 같은 의구심이나 방역실패에 대해 그 편의 누구에게서도 수치스러워하거나 일말의 미안해하는 마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점점 곳곳에서 홍위병 그림자가 비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공영방송을 떠나 유튜브로 몰려들었다. 대통은 자기편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사람처럼 보였다.

 

대통의 성향을 알아낸 영합꾼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소음과 부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급기야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덮쳤다. 사람들이 감염되고 죽어가고 있는데도 방역의 실패가 아니라 시장이나 도지사를 잘못 뽑아서 그렇다는 중세 마녀사냥할 때나 있을 법한 말까지 나왔다. 그것도 꽤 유명세를 뽐내고 있는 여류소설가의 입으로 말이다. 무엇이 그녀를 마녀사냥의 심판관으로 만들었을까. 자기 안의 생각을 성찰하지 못하고 생각의 프레임에 갇혀 내 편이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 배출했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무당의 소리는 일대일의 관계지만 그녀가 낸 소리는 다른 편을 악령으로 겨냥한 주문이었다.

 

일이 일어날 조짐을 알고 양쪽의 단서를 다 살펴서 대처해야 함은 대통에 요구되는 책무다. 그런데도 코로나19의 사태에서 보는 것처럼 늘 보고 싶고 듣고 싶은 쪽으로만 듣다가 엄청난 손실을 초래했다. 게다가 국민이 죽어 나가고 경제에 먹구름이 밀려오고 역병이 곳곳에서 창궐할 조짐이 보이는 시점에도 기생충 제작자들을 불러 구중궁궐에서 폭소파티를 열었다. 참으로 그 장면을 보는 우리가 민망할 정도였다. 아무리 예능시대라고 하지만 대통의 자리는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자리이다. 자기의 신념만 따르고 그저 쇼 정도 하는 것으로 그 자리의 가치를 알고 있다면 그런 사람을 대통으로 부를 수가 있을까. 대통이란 크게 통합하는 뜻이다. 내 편만 믿고 내 편에 뜻에만 부합하는 사람이 대통의 큰 그릇에 담길 수가 있을까.

 

기어코 봄이 왔다. 따듯한 햇살이 온 천지에 퍼지는 봄이 왔건만 마음은 왜 이리도 무겁고 아플까. 나와 대통과의 심리적 거리는 처음부터 이렇게 멀어 떨어져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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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쉼표

한라산의 하늘을 보다

늘 삶의 어딘가에서 쉼표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럴 때는 인생살이에 답답한 뭔가가 알게 모르게 깊숙이 들어와 쌓여 있다는 증거다. 그럴 경우 나는 바다로 간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바다의 일렁이는 파도를 보면서 허전함을 달래는 편이다.

 

동해 바다는 거칠고 광활하다. 그곳으로 가면 나란 존재가 한없이 왜소해져 온갖 번뇌가 가볍게 느껴진다. 맺힌 감정을 거친 바다에 던져서 날려버릴 수 있다. 시원한 바다, 황량한 주변풍경, 비릿한 바다내음이 어우러져 사람간의 관계에서 생긴 고뇌를 날려버리기에 좋다. 남해나 서해는 그냥 보이는 모습만 다를 뿐이지 별다른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제주도는 특이하다. 지형부터가 육지와는 판이하게 다르고 바다가 주는 풍경도 독특하다. 이국적이면서도 이국적이지 않고 속세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속세와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해 준다. 묵은 번뇌를 감싸 안아주면서 묘하게 사라지게 만들어버린다.

제주도 바다는 한라산이 있기에 더욱 더 특별한 바다가 되었다. 제주도 바닷가에 서면 사람의 마음을 안아주고 보듬어 주면서 한라산의 너른 품으로 데리고 가서 백록담처럼 고요한 마음을 닮게 해 주는 듯하다.

 

몇 번이나 제주도에 갔지만 저 멀리서 우뚝 솟아 있는 한라산 백록담까지 올라가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느 해 겨울에 한 번 올라가려다가 눈 폭탄으로 등산로가 폐쇄되는 바람에 사라오름까지 오른 정도로 만족하고 아쉽게 발걸음을 돌린 적이 있었다. 제주도 여행은 보통 3일 내지 4일 정도로 짧은 편이다. 정상을 한 번 갔다 오면 다른 일정이 빠듯하기에 등산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여름이 지나고 나자 갑자기 백록담의 실제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한라산의 설문대할망여신이 이제 올라와도 된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처럼 느껴졌다.

 

몇 년 전 정상에 오르기 위해 기점으로 잡았던 성판악 코스로 출발점을 정했다. 주차장은 이미 진입불가로 약 200미터 떨어진 도로가에 주차를 했다. 입구에 도착하니 10시가 채 되지 않았다. 금잔디 휴게소까지 1230분까지 도착해야 정상으로 갈 수 있다는 커다란 안내판이 보였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기에 쉬지도 않고 길을 재촉했다. 길은 샛길 없이 허용된 등산길로만 갈 수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굴거리나무가 제법 군락을 이루고 있고, 어느 순간, 주변은 온통 조리대 천지다. 도토리가 쉴 새 없이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저 도토리에도 제주의 바람, 태풍, 천둥이 들어가 앉아 저렇게 소리를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촉박하여 더 이상 주위에 눈길을 줄 틈도 없이 오르고 또 올랐다.

 

마침내 금잔디 휴게소에 들어섰다. 1237분이었다. 뜻밖에도 등산로를 지키고 있는 국립공원관리직원은 우리에게 올라갈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 황당했다. 나는 자동차 속도도 허용되는 오차범위도 있고 항공시간도 승객의 사정에 의해 늦어질 수 있는데 7분 정도 늦은 것 가지고 입장을 시켜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고 항의를 했다. 직원은 1분이 늦어 못 간 사람도 있다고 하면서 조금씩 편의를 봐주면 끝이 없다고 더 단호하게 말을 했다. 통사정과 논리를 던져보지만 의외로 태도가 완고하다. 작전을 바꾸었다. 원칙과 입장을 수긍한다고 하면서 인간적으로 부탁을 해 본다. 나도 간간侃侃한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보다 더한 깐깐한 사람이다.

계속 말을 하면서 방법을 찾아보았다. 상대방이 우려하는 문제는 안전이었다. 같이 가는 일행을 책임지겠다는 말에, 순간 틈이 보이는 듯했다. 우선 뒤쪽에 앉아있는 등산객 중에서 정상까지 가고 싶어 하는 분이 몇 분이나 되는지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저 멀리서 우리 대화를 주시하고 있는 분들을 향해서 정상가실 분은 이쪽으로 한 번 와보세요.”라고 소리쳤다. 직원은 마치 내가 보내주는 것 같다고 말을 하지만 나의 제안에 관심 있어 했다. 정상까지 가겠다는 사람은 우리 부부를 포함해 6인이었다.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갔다 오겠다고 하니 마침내 허락하면서 2시까지는 정상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말한다.

 

1시간 반 만에 정상까지 가야 하는데 꽤나 빠듯한 시간이었다. 등산로는 완만한 경사에서 난이도가 높은 비탈길로 이어졌다. 한번 앉아서 쉬지도 못하고 올라가다 보니 정상을 목전에 두고서 기진맥진해졌다. 마침내 백록담과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정상에 올랐다.

 

순간 맑은 가을하늘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하얀 뭉게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아래를 보니 키 작은 관목도 서서히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고, 엉겅퀴를 닮은 야생화도 지천에 피어 있었다. 백록담은 한 쪽 귀퉁이에만 물이 조금 고여 있었다. 기대했던 모습은 아니지만 힘들게 도착한 우리를 포근히 감싸 안아 주는 듯했다. 저 멀리 너른 중산간지대가 보이고 그 밑으로 점점이 박혀 있는 인간세상, 그리고 바다가 에워싸고 있다. 한라산을 오른 걸 축하라도 하듯 하늘은 연신 하얀 솜사탕 같은 구름으로 순간을 연출한다. 살갗에 닿는 바람은 춥지도 덥지도 않고, 강하거나 약하지도 않은 게, 그냥 딱 좋은 바람이다. 선계가 따로 없다. 선계가 있다면 이런 모습을 보고 선계라고 하지 않을 까. 그냥 여기서 한없이 하늘과 산의 기운을 느끼면서 머물고 싶었지만 시간이 다 되었다고 하산하라는 독촉이 제주 바람처럼 거세다.

 

한라산은 밖에서 볼 때는 그냥 하나의 큰 산일 줄 알았는데 속으로 들어와서 보니 평원도 있고 엄청 많은 오름으로 구성된 거대한 산이었다. 올라갈 때는 시간의 압박감으로 몸의 상태를 몰랐는데 내려가자니 서서히 종아리 근육부터 당기기 시작했다. 내려가고 내려가도 끝이 없는 듯, 완만한 길로 이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풍경은 의외로 단조로운 모습일 뿐이다. 어느덧 조금씩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성판악 입구에 다다랐다. 왕복 8시간 30.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오래된 숙제를 푼 것 같았다.

 

정상을 바라보았다. 이제 한라산은 내게 먼 존재가 아니고 늘 가까이 있었던 산으로 다가왔다. 제주의 어느 곳에서 한라산을 보더라도 먼 산이 아닌 나의 산이 되어 있기에, 내 기억의 한 곳에서 선명하게 늘 있을 것같다. 한라산으로 인해 바닷바람은 제주의 바람이 되었고, 한라산은 바다가 있어 한라산이 되었다. 한라산은 너른 품으로 지친 나를 안아주고 어루만져 주었다. 한라산에서 풍파에 매이지 않는 여유를 느꼈고, 한라산이 만들어놓은 바다에서 세파에 휩쓸리지 않는 지혜를 조금 얻은 것 같다. 이제 한라산은 모처럼 마음을 먹고 가는 산이 아니라 불쑥 찾아가도 어색하지 않는 친구 같은 산이 되었다.

 

살다보면 가끔 마음이 멍멍해지는 때도 있고, 삶의 무게로 어깨가 무거워지는 순간도 있을 테다. 그럴 때 한라산 정상에서 마주했던 산바람, 넓은 품새,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바다를 떠올리며 인생의 쉼표를 찍고 싶다.

 

태백의 밤하늘

오만원

냉면을 시키고 나서 메뉴표를 보았다. 10년 전쯤이었으니 냉면 한 그릇 가격은 당연히 오천원이겠지 생각했다. 얼핏 보니 동그라미가 하나 더 있는 듯해 보였다. 우리 모두의 눈빛은 설마라는 소리를 불러내는 듯했다. 잘못 쓴 숫자거니 생각하면서도 끝내 진위를 캐고 말겠다는 의지로 종업원을 불렀다. 오만원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은 번개가 치고 난 다음 일어나는 천등소리처럼 요란스러웠다. 일순 식당을 나가야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들 얼굴에는 놀람과 당혹감이 베여있었다. 세상사를 헤쳐오면서 쌓아올려진 남자들의 자존심이 아니던가. 일상에서 벗어난 여행이기에 돈의 제약으로 안방마님들의 마음을 무겁게 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 냉면은 그때까지 먹어본 냉면 중에서 가장 비싼 냉면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기족간의 정을 이어주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 세상사에 바빠 무심코 묵혀 놓은 형제간의 옛정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여름휴가를 작은형 내외와 함께 다닌 지도 거의 10년이 되었다. 태백은 거의 단골 휴가지다. 오래전 강원랜드에서 있었던 그 사건은 여름휴가 중에 늘 우리를 웃게 만드는 추억이 되어 있다.

 

올해도 강원랜드에서 묵었다. 사방에서 기상관측이 있고 나서 최대의 폭염이라고 아우성이지만 태백의 밤기운은 그 열기를 식히기에 충분히 남음이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 냉면 사건을 끄집어내 회상하고는 무더위로 무거워진 마음에서 빠져나와 어린 시절로 되돌아 간 듯 즐거워했다. 여름날 태백은 그냥 태백산 언저리에서 시원한 몇 줄기 바람만 마시고 떠나가도 위로가 되는 곳이다.

강원랜드 바로 인근에 만항재가 있다. 고산지대에만 피어나는 꽃들이 지천에 널려 있어 천상의 화원이라 불리어지는 곳이다. 여기에 들어오면 인간살이로 더워진 마음을 사방에서 불어오는 산바람으로 저절로 식힐 수 있으니 정말로 속세를 떠난 천상처럼 느껴진다. 이곳은 함백산과 태백산의 중간이라 함백산과 태백산을 모두 손으로 잡을 듯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차로 올라가는 고갯길 중에서 가장 높은 재이며 가리워지지 않은 하늘과 정면으로 맞닥뜨릴 수 있다.

 

늦은 밤 10, 우리는 만항재에 돗자리를 폈다.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다 담지 못해 쏟아낼 듯 별들은 촘촘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처럼 하늘의 천문에서 별을 찾기 시작했다. 화성, 목성, 토성, 북두칠성과 북극성, 십자성, 카시오피아.

저 많은 별들 중에서 우리가 아는 별의 이름은 황당하게도 손가락 갯수를 넘지 못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은하계는 안드로메다 성운 옆에 있는 우리 은하계라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별들의 이름을 아는 지식이 손가락 갯수를 넘는다고 해서 천문天文지식은 더 많아지지 않을 듯 했다. 아니 태백 밤하늘의 별은 지식의 확장이라는 인간의 노력이 기실 무지의 폭만 증명해 줄 것 같았다. 새삼 지식의 크기는 행복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아는 별 몇 개 세어보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즐거웠고 마음은 넓은 하늘처럼 포근했다.

 

순간 저 먼 허공에서 유성 하나가 날더니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잠시 마음이 먹먹했다. 그렇다. 우리 삶도 잠깐 빛났다 사라지는 유성처럼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갈지 모른다. 그냥 지구라는 공간에 잠시 존재했다가 사라져 갈 뿐이다.

 

그러고 보니 오만원의 냉면도 기억 속에 숨어 있다가 살다가 외로움으로 힘들 때 유성처럼 떠올려질 터이다. 유성은 어릴 적 여름날 모깃불을 피워놓고 평상에서 온 기족이 비집고 누워서 찾기 놀이를 할 정도로 흔하게 볼 수 있는 별이었다. 그런 유성을 이제 도시의 하늘은 말할 것도 없고 어지간한 시골에서도 볼 수 없기에 까마득하게 그 존재를 잠시 망각했다. 아마 요즘 세대들은 유성이라는 이름을 모를 수 있을 정도로 하늘의 밝기와 세상도 변했다. 참으로 오랫만에 유성을 보았다. 유성은 세파에 찌들러진 마음을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게 하고 가족 간의 따뜻한 정으로 숨 쉬게 해주는 천상의 쉼표인 듯싶다.

 

셀 수 없이 많은 별과 유성을 볼 수 있는 만항재의 하늘은 보석과 같다. 행복이라는 기억 속에 고이 간직해서 두고 두고 보고 싶다. 우린 내년에 또 저 밤하늘을 보러 오겠다는 기약을 불어오는 바람에 새기고 이미 어두움에 깊게 묻혀버린 만항재를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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