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그리는 자화상

인생의 반환점을 돌면서 지나온 삶의 자취를 뒤돌아보았다. 인생의 무게에 눌린 탓인지 내가 그리는 하늘의 크기는 너무나도 작아져 있었다. 무엇을 꿈꾸며 날았는지 삶의 궤적은 희미하지만,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고픈 자취를 말해주듯 오래된 책들이 전시관의 화석처럼 한쪽 벽에 진열되어 있다.

 

돌이켜보니 책은 내 속의 나를 찾아가게 하는 꿈이었다. 책을 읽는 순간은 자유를 꿈꿀 수 있었다. 장자 소요유逍遙遊한 번 날면 구만리를 날아오르는 붕이라는 새를 겨우 나뭇가지 정도밖에 오르지 못하는 뱁새가 붕을 비웃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현실에 갇힌 왜소함의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비유다. 나는 무한한 세계로의 비상을 책을 통해 꿈꾸었다.

 

책과의 인연은 좀 있는 편이었다. 어릴 적 어머니가 태몽으로 본 나의 사주를 들려주었다. 과 친할 팔자라고 했다. 청소년 시절, 앞길이 막막하여 학업에 대한 흥미가 없을 때에도 책에 대한 관심은 조금 있었다. 인생이란 항로에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책과의 인연은 희미한 불빛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졌다.

 

한국에서 태어난 남자들에게 군대는 참 이상야릇한 풀무와 같다. 군대에서 때늦은 철이 들었다. 마치 봄에 새싹이 올라올 때 대지에 균열을 일으키듯, 인생에 대한 자각의 힘이 책을 벗 삼아 기지개를 켰다. 바깥출입이 많았던 보직이라 틈틈이 군립도서관에 출입하였다. 이런 내가 좀 대견해 보였는지 도서관장은 기꺼이 책을 빌려 주었다. 대학생일 때에는 전공이 아닌 책을 사 보는 게 주머니 사정상 어려워 도서관에서 자주 대출받아 읽었다. 회사에 다니기 시작해서는 서점의 책과 경제적인 거리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책은 읽어보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무엇보다 서점에 가서 쭉 훑어보고, 눈에 쏙 들어오는 책을 발견하면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기뻤다. 주머니에 약간의 여유가 생기고 난 뒤로는 일주일 동안에 읽을 수 있는 분량의 책이 아니라 대충 제목을 보거나 머리말만 보고서 한꺼번에 여러 권을 사곤 하였다. 출장 등으로 낯선 장소에서 며칠 머무를 때에도 가급적 동네서점을 둘러보며 의무감이라도 있는 듯 책을 사곤 했다. 주말부부로 타지에서 근무했던 시절에는 그 지역의 서점과 꽤 친하게 지냈었다. 거의 이십 년 전의 일이다. 노르웨이에 한 달 간 연수 후 돌아오는 길에 기내로 짐을 부칠 때 짧은 영어 탓도 있었지만, 구입한 책 무게로 항공기 초과요금을 꽤나 물었던 불편한 기억도 있다.

 

수십 년을 틈나는 대로 사 모은 책은 어느덧 욕심만큼 늘어났다. 집은 넓히지 못하고 책꽂이만 점점 늘어났다. 술이 술을 먹듯이, 책을 사는 취미도 버릇이 되었다. 책 제목만 보거나 서문 몇 줄만 읽고서 언젠가는 읽어 보겠지 하는 생각으로 사서 모았다. 늘어난 책들만큼 책에 메이다 보니 자연히 부자가 되고픈 욕구는 줄어들었다. 오십 중반을 지나니 책을 보면 눈이 침침해지기 시작하였다. 어느 순간부터 활자체가 작은 책은 중압감으로 다가오고 새로운 책에 대한 호기심이 줄어들었다. 요즘도 가끔 서점에 들러 무슨 책이 나왔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둘러본다. 이때도 제목만 훑어보거나 책장을 넘기면서 눈동냥으로 호강하는 경우가 더 많다. 더러 책을 사보기는 하나 바로 사지 않고 몇 번씩 열람 후 사는 편이다.

 

지천명의 중반을 넘긴 후에는 전공과 관련된 책은 미련 없이 거의 처분해 버렸다. 이젠 내가 한때 관심 있었던 책들만 있다. 집이고 사무실이고 가까이 있는 곳에는 책이 있다. 어떤 때는 책도 생물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 책이 세월의 무게까지 얹어 나에게 무언의 압박을 주는 것 같다.

 

밤마다 나의 눈길을 기다리는 책이 있는 듯하다. “언제 읽으려고 샀어요, 왜 나한테 관심을 주지 않냐하고 무언의 소리를 낸다. 그렇다 해도 선뜻 찾아서 다가가지 못한다. 나의 욕심으로 너무 많은 책을 사 모은 듯싶다. 그동안 몇 번의 이사 때마다 가장 애물단지가 책이었다. 책을 골라서 버리기도 했으나 막상 떠나보내는 게 영 만만하지 않았다. 집에서 어느 순간 큰 맘 먹고 쓸모없는 책을 고르는 중에 한때의 추억이 묻어 있고 또 언젠가 한 줄이라도 필요할 구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십 권의 책을 버리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그동안 사 놓은 책 중에서 읽은 책은 얼마나 될까, 무엇 때문에 굳이 책을 사서 보려고 하였을까. 가끔 밤에 홀로 몇십 년에 걸쳐 서가에 꽂혀있는 책을 훑어 보면서 상상의 스케치를 그려 본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나의 자유의지로 이곳까지 와 있는 벗들이다. 친구의 인품을 통해 주인의 인격을 가늠하듯이 책의 제목을 통해 내가 추구한 삶의 이면을 솔직하게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마치 화가가 자화상을 그리듯이 말이다.

 

찬찬히 제목만 훑어보면 결국 동양학의 세계를 더듬었던 것 같다. 불학, 주역, 유학을 비롯한 동양학, 기학, 동양의학, 잠깐씩 손자병법, 경영학, 관상, 풍수, 신과학에도 관심이 있었던 흔적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기억에 남는 책이 몇 권 있다. 과학의 재미를 일깨운 The histoty of science, 불교와 일반시스템,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동양의학으로 관심을 이끈 동양의학혁명, 주역의 과학적 접근이라는 말로 호기심을 유도시킨 주역원론, 조금은 난해했던 우주변화의 원리. 노자의 세계로 관심을 이끈 노자철학 이것이다. 삶이 힘들 때 읽어본 금강경육조단경, 인생의 중반전을 넘긴 시점에서 가슴에 와 닿는 주역, 논어, 맹자. 이런 종류의 책은 수많은 사람의 생각을 덧붙여 오면서 역사의 무게를 견뎌낸 탓인지, 거듭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 묘한 매력을 품고 있다.

 

간혹 나 혼자 비밀의 화원에 있는 꽃을 찾는 마음으로 책을 바라본다. 생을 떠날 인연이 왔을 때 무덤까지 가져갈 수 있는 책은 몇 권일까. 불과 십여 권도 되지 않을 것 같다. 생을 넘어 죽음 이후의 여행에서도 함께 할 문우는 주역, 금강경, 논어, 노자 정도일 게다. 최후의 순간에 한 권만 골라라 한다면 무척 고민이 많을 듯 싶다.

 

그동안 책이란 친구 덕분에 힘든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버텨낸 듯싶다. 남은 인생도 오랫동안 함께 한 책의 향을 맡으면서 살아가고 싶다. 논어는 학으로 시작해서 지인知人으로 끝을 맺는다. 인생은 학을 통해 사람을 알아가고, 결국 나와 남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인생의 마지막 문턱을 넘을 때까지 책을 친구로 하여 여행을 계속하고 싶다.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커피의 마음을 읽다  (0) 2020.02.21
부에 대한 짧은 생각  (0) 2020.02.21
알파고가 드러낸 어떤 세상  (0) 2020.02.13
맹자를 만나다  (0) 2020.02.07
레드, 거대한 벽  (0) 2020.02.0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