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 대한 짧은 생각

봄인가 싶더니 벌써 더위가 느껴진다. 계절의 변화는 선을 긋듯이 뚜렷이 구분되어 찾아오지 않는다. 언제 오나 안달하다 보면 어느덧 아침 저녁에 이는 바람으로 그 자취를 드러내고 있다. 오월이 되면, 나무들은 엷은 색깔의 연초록 옷을 입고 있고, 곳곳에 피어 있는 꽃과 함께 어우러져 그냥 그대로 색채의 향연을 펼친다. 이런 대자연의 아낌없는 선물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 새삼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

 

자연은 속살마저 이처럼 아낌없이 보여주고 내어 주는데, 사람은 본 만큼 느낀 만큼만 가질 수 있다. 누리는 즐거움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에만 있지 않다. 살면서 부족하다고 여기는 까닭은 눈길이 끊임없이 외부로 달려가기 때문이다. 마음을 조금만 침잠시키면 계절마다 자연이 주는 은밀한 속삭임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우리네 삶도 그럴 것이다. 삶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소박한 일상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에 있음을 느낀다.

물질적 욕망으로 가득찬 세상이다. 어느덧 회사에 들어간 지 30여 년이 넘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다닐 수 있을지 모르지만 종착역은 나타났다. 옛날 선배들의 취중농담에 봉급쟁이들은 자식들 교육시키고 나면 남는 거라곤 집 한 채, 승용차, 밥그릇이 고작이다라는 말이 실감된다. 결국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산 없이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사람은 요즘 흔히 말하는 흙수저의 원형이다. 벼룩은 뛰어야 벼룩인 것을 알기에, 내 한 몸, 내 가족 편한 걸로 안도하며 살아왔다. 주변의 또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주된 관심사가 건강, , 일이다. 그런데 삼박자를 모두 갖춘 사람은 거의 볼 수 없다. 돈만 해도, 돈 벌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기대와는 사뭇 다른 듯하다.

 

돈에 대한 막연한 욕망을 넘어서 부자로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부자가 되면 자유와 권력을 가지는 것 이상으로 일상에서 달라지는 점으로 무엇이 있을까.

 

우선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마음껏 먹을 수 있지만, 소화에 부담을 느끼니 비싼 음식에 그다지 흥미가 없어진다. 멋진 옷을 입겠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쓸 일이 점점 없어지니 그저 편안한 옷이 최고다. 멋진 저택에서 살 수 있지만, 집을 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에다가 신경 쓸 일이 많아 귀찮다는 생각이 든다. 외국여행을 자주 갈 수 있지만, 나이 들어가는 탓인지 굳이 열 몇 시간 비행기 타고 나가서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엷어져 간다. 골프를 마음껏 칠 수 있지만, 골프 치는 시간과 비용이 아깝고, 인맥관리의 피로도가 만만찮아 내키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식들 결혼시킬 때 집을 사 줄 수 있지만, 대학 마칠 때까지 든 등록금을 빚으로 떠넘기지 아니한 것으로 역할은 다했다. 이처럼 부자가 되면 좋은 이유도 끝없이 있을 테고, 부자가 되지 않아도 좋을 핑계도 그만큼 많을 듯싶다.

결국, 부자란 나를 둘러싼 환경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한 과정에서 찾아오는 손님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어쨌든 과거의 기억과 비교해 보면 물질적 가난은 벗어났다. 옛 시절을 기억해보면 뭐니 해도 궁핍한 생활이 먼저 떠오른다. 중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없었다. 겨울에 나무하러 산에 갔어도 먹을 것이 부족해 소나무 속껍질을 씹거나 배추뿌리를 찾아서 먹기도 했다. 보리를 수확하기 직전, 춘궁기에는 굶거나 죽 한 그릇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겨우 중학교 들어갈 쯤에야 하루 세끼 밥을 먹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한자 부를 파자해 보면 집이 있고 한이 먹을 수 있는 땅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 한국이라는 땅에 태어나 밥을 못 먹거나 겨울에 따뜻한 옷이 없어 추위에 떠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니 우리나라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부자가 아니겠는가. 결국 부자는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부는 행복해지기 위한 과정에서 찾아오는 손님과도 같다.

 

행복을 돈과 욕망의 관계로 표현해보면 둘은 반비례 관계일 것이다. 돈이 많더라도 추구하는 욕망이 커지면 행복감은 올라가지 않고 오히려 욕망을 줄일수록 더 커지게 된다. 그럼에도 삶이 버거울 때 대부분 욕심을 비우라고 말을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오히려 물질의 추구보다 더 어려운 것이 마음 비우는 일임을 경험을 통해서 안다. 부자가 되는 길은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면서 물질이 주는 행복감에 빠지지 않고 마음을 다스려 욕망의 크기를 줄여나가야 되는 데에 있다. 그럴 때 찾아오는 부는 경제적 자립과 정서적 자존이 합일되는 지점에서 나타나는 선물일 테다. 나도 이제 부자가 되고 싶다. 주위의 시선에 의해 인정되는 부자가 아닌 물질적 구속으로부터 몸의 욕구를 줄일 수 있고, 타인과의 상대적 비교를 벗어나 심리적으로 자유로운 부자 말이다.

 

오월의 시작을 알리는 봄비가 아침부터 촉촉이 내린다. 오늘은 텃밭에 채소 씨를 뿌려야 한다. 종일 비가 오면 이 계획이 틀어진다. 농사란 한 때를 놓치면 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하는 일이고 보니 마음만 분주해진다. 하지만 농사일은 오늘 꼭 해야 되는 일은 거의 없다. 주말에만 일을 모아서 하다 보니 마음이 급한 모양이다.

 

처음 시골에 움을 낼 땐 좀 느긋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겨우 텃밭 가꾸는 주제에 기다림의 미학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말았다. 농사란 처음 씨 뿌리고 난 후, 풀 뽑고, 물주고, 병충해와 싸우면서 자연의 조화를 기다려야 하는 일이다. 그냥 내버려 두어도 잘 되겠지 하는 느긋함이 필요하다.

 

아침 일찍 커피향과 함께 커피를 음미하면서 바깥의 새소리를 듣는다. 이미 밖에는 겨울의 한기를 이겨내고 꽃을 활짝 피워낸 철쭉나무가 싱그럽게 피어있다. 이 순간만큼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하는 상대적인 개념은 사라진다. 새삼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슴에서 머리로 흘렀던 강물의 노래  (0) 2020.02.29
커피의 마음을 읽다  (0) 2020.02.21
책으로 그리는 자화상  (0) 2020.02.21
알파고가 드러낸 어떤 세상  (0) 2020.02.13
맹자를 만나다  (0) 2020.02.0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