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서 머리로 흘렀던 강물의 노래
김태열
잠시 눈을 감았다. 처진 눈꺼풀 속에 꽤 오랜 세월이 스며들어 있었다. 뿌연 안개 속에서 서성인 듯 기억은 갈래를 찾을 수 않다. 찾으려고 애쓸수록 가늠할 수 없는 깊은 물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저 멀리 기억의 뒤끝을 돌아보니 몇 구비나 산기슭을 돌았는지 가물가물한 고갯길에 숫자 한 줄이 뚜렷이 드러났다.
1985.1.7.
수공에서 어언 35년의 세월을 보냈다. 봄에 막 돋아나는 나무처럼 풋풋했던 모습이 가을에 소리 없이 잎을 떨구는 고목처럼 온 얼굴에 굵고 깊은 주름이 짜글짜글 새겨져있는 초로의 사내로 움츠려들었다.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 이렇게 많은 시간을 붙잡았으면 손에 무언가 꽉 잡히는 게 있을 법도 하건만, 힘이 빠진 주먹에는 자괴감만 남았다. 그래 그렇게 젊음으로 달구었던 세월은 굵어진 손가락 마디에 몇 가지 기억을 묻어놓고 손가락 사이 벌어진 틈으로 행하니 지나가버렸다.
흘러간 세월처럼 흐르는 물과 함께 한 시간이었다. 노도와 같이 흘러가는 물에서 허우적거리기도, 물결치는 수로에서 파도와 씨름해보기도, 조용한 물에서 흘러가는 물을 관조하면서 한바탕 물놀이했던 것 같다.
방수로와의 인연을 맺다
처음으로 배치를 받은 근무지는 고향 근처에 있는 남강댐이었다. 입사한 첫 해인 1985년은 우기에 유달리 비가 많이 왔었다. 거의 70일이나 야간에 방재근무를 했던 기억이 난다. 5년의 근무기간에 악몽과도 같았던 태풍 “셀마”가 기억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1987년 7월 초 야간 방재근무를 하는데 저녁 8시가 넘는 무렵부터 비가 거의 양동이로 퍼붓듯이 쏟아졌다. 밤 10시부터 댐에서 열 수 있는 모든 수문을 최대한 열어놓고 하늘만 쳐다보았다. 수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수문상황을 분석하고 통보해주고 방송인터뷰를 하였다. 새벽 2시 무렵 성난 홍수처럼 질주하던 댐수위가 계획홍수위 부근에서 멈추어 버렸다. 두려운 마음으로 급히 차를 타고 댐에 가보니 불빛에 비친 저수지는 온통 황토색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성난 물은 여수로 공도교 위로 찰랑찰랑되고 있었다. 댐이 무너질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으로 온몸이 오싹했었다. 새벽 3시를 넘어서 진주경찰서로부터 댐 하류 시민 대피방송을 해야 되지 않겠냐는 비상전화를 받았다. 댐수위가 정점을 지났다고 판단해 조금만 기다려보자고 했던 기억이 난다. 둥이 트기 시작할 무렵 댐수위가 천천히 내려가면서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광분한 한 무리의 민원인들이 버스를 타고 댐관리단으로 쳐들어가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경찰의 방어선을 뚫고 사무소에 진입한 상류지역 주민들은 들이닥치자 말자 보이는 대로 부수기 시작했다. 문이랑 문은 모조리 박살났고 주민들한테 붙잡힌 관리소장은 끌려가고 말았다. 그래도 숨죽이며 홍수통제실을 지켜야만 했다. 시위대가 물러가고 겨우 숨을 좀 돌리면서 피해상황을 파악할 무렵, 이번에는 사천만 지역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분풀이를 할 대상이 없었는지 사무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결국 육중한 철문으로 굳게 닫은 통제실의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다른 방으로 피해 저항했지만 잡혔다, 옷이 찢어지고 얻어맞고 멱살을 잡힌 채 사천만 침수지역으로 끌려갔다. 온갖 수모를 격은 후 밤 10시 쯤 겨우 풀려났던 것 같다.
댐 상류와 사천만 지역 주민들이 우리를 잡아가고 사무실을 박살낸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방재근무자가 홍수가 오는 줄도 모르고 잠자다가 수문조작을 제대로 하지 못해 불어난 댐수위로 상류가 침수되었다는 것이고, 깨어나서 사천만 방수로로 한꺼번에 물을 방류하는 바람에 사천만 연안지역이 침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참 말문이 막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몇 년간의 대규모 침수피해소송이 벌어졌고 기록된 수문자료와 녹음된 자료로 우리 쪽의 억울함은 풀려지게 되었다.
얼마정도 시간이 지난 후 홍수흔적을 찾기 위해 상류 하천과 방수로를 조사했다. 엄청난 홍수위 흔적에 입이 벌어졌다. 특히 수로 폭 80m로 초당 5,460톤을 보낼 수 있는 홍수조절의 주된 시설인 사천만측 안부급류수로부의 우안 옹벽이 일부 전도되고 바닥슬래브가 크게 훼손되었다. 이곳은 방류량이 초당 3,000톤 정도만 되어도 너무나 빠른 유속으로 사위가 그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주는 곳이다. 태풍 ‘셀마’는 성난 괴물처럼 댐 상류에 교량 약 15개소를 파괴하였고 인명피해도 십여 명 이상을 앗아갔다. 부산 경남지역에 큰 피해를 남긴 ‘셀마’를 계기로 남강댐은 새로운 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남강댐은 유역면적이 거의 소양강댐과 비슷하고 비가 많이 오는 지역임에도 댐높이는 매우 낮다. 홍수를 대부분 인공수로인 방수로를 통해 사천만으로 보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방수로와 첫 인연을 맺었다. 인연의 묘함인지 수자원공사에서도 특별한 사업인 굴포천방수로사업, 경인운하사업, 경인아라뱃길과 경인항 건설까지 근무인연이 이어졌다. 방수로와 주운수로 같은 인공수로를 만드는 일은 수자원공사에서 근무한 이력 중 가장 기억에 남아있는 일이다. 불쑥 기억의 심해에서 포말 하나가 솟아오른다.
굴포천방수로 건설 첫 삽을 뜨다
도시지역인 인천시 부평구, 부천시가 소재하고 있는 굴포천 유역은 해마다 구조적인 홍수피해를 겪고 있었다. 이 지역의 침수피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홍수를 한강이 아닌 서해로 배제하기 위한 굴포천방수로 건설사업은 경인운하사업과 연계되어 십 수년째 수로 굴착공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부와 수공은 시급한 홍수피해 해결을 위해 먼저 수로 폭 20m, 수로 길이 약 14km의 임시방수로를 뚫기로 했다. 수도권 환경단체와의 갈등은 그럭저럭 봉합했지만 문제는 공사에서 발생하는 토시와 약 700만㎥에 달하는 굴착암의 처리였다. 약 10개월에 걸친 돌관공사를 무사히 마쳤지만 암 처리와 관련하여 사후 감사와 조사까지 받게 되었다. 공사계획을 수공이 수립하였기에 한 달간의 특별조사를 받게 된 것이다. 매일 감사관들이 출근하연 조사받고 암을 왜 그렇게 처리했냐고 추궁을 당하니 정신적으로 꽤나 힘들었다. 막상 격려가 필요한 순간인데 오히려 책임에 따른 선긋기가 일어났다. 절해고도에 있는 듯했다. 결국 지자체의 행정처리만 문제가 되었고 수공의 잘못은 없는 것으로 되었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일수록 책임이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일의 해결을 위해 누군가는 책임을 안고 추진해야 한다. 임시방수로가 건설되고 나서 몇 차례 큰 비에도 굴포천 유역의 침수피해는 거의 없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보람으로 우리의 서운함은 씻겨 내려갔다. 이 사업을 시발점으로 수로 저폭 80m의 굴포천방수로 건설사업과 경인운하사업의 추진여부가 서서히 가닥을 잡기 시작했다.
경인운하사업의 명암
수도권 환경단체의 감사요구로 민간투자사업인 경인운하사업에 대해 감사원에서 약 한 달간에 걸친 특별감사를 하였다. 국토부와 수공, 민간사업자가 함께 감사를 받아야 했는데 막상 감사가 시작되니 우리가 거의 담당해야 했다. 모르쇠와 전화도 거의 받지 않는 민간사업자를 감사원도 어찌할 수 없었다. 수공 담당직원은 모두 5명, 국토부 3명, 투입된 감사요원은 거의 20인이었다. 아침 9시부터 과천청사 감사반에 출근도장 찍고 감사를 받다보면 오전이 가고 다시 오후로 이어지고, 답변자료 만들다 보니 한 달 간의 감사기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다시 연기된 감시기간과 감사 사후처리까지 몇 달 간에 걸친 감사였다. 국정감사 바로 전날 저녁 9시 중앙방송을 통해 발표된 감사결과는 사업의 전환점이 되었다.
굴포천방수로 사업은 조속히 시행하고 경인운하사업은 해외용역에 의해 재검토후 추진하기로 한 것이었다. 경인운하 재검토용역을 위해 이름도 생소한 ‘국제컨설팅엔지니어링연맹FIDIC’에 의해 처음으로 주계약자를 외국용역업체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영어와 크레임 리스크에 대처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여러 부서에서 재능을 숨기고 있는 직원들의 참여로 발주와 용역업무를 무사히 수행했던 것 같다.
민자사업인 경인운하사업에 대해 국토부는 수자원공사에 여러 가지 업무를 위임했는데 설계검토를 통한 사업비 조정 업무가 있었다. 그 당시 민자사업은 민간사업자가 제출한 사업비를 근거로 운영수익 보장이나 운영기간을 결정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공사비가 과다하다는 지적이 많아 국토부는 민자사업 처음으로 설계에 대한 적정성 검토를 우리에게 맡겼다. 수로, 갑문, 항만시설, 접근수로, 박지, 장대교량, 호안공, 유로도로 등 설계내용을 먼저 자체적으로 검토하고 나서 국토부와 협의를 하고 다시 설계용역사와 합의를 하면서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소속 부서장으로부터 위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당신이 용역회사로부터 돈을 받고 설계공법을 바꾸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였다. 참 황당한 소리가 있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고, 어느 날 부서장으로부터 설계 검토내용을 보고해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문제는 갑문과 항만, 호안시설에 설치되는 영구 차수벽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한 방식공법 변경이었다. 민간회사에서 제출한 공법은 경식도장 방식이었다. 도장자체는 매우 견고한 방식이나, 다만 차수벽을 항타하는 과정에서 도막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날 수 있고, 그 틈으로 담수나 해수가 스며들면 녹이 슬어 부식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검토를 통해 경식방식을 연식방식으로 변경하려고 하는 중이었다. 부서장은 우리 실무자의 의견을 들어보고 다른 회사의 경식도장 시공사례까지 폭넓게 조사하였다. 조사결과 예상대로 상당한 부식현상이 발생되고 있어 속으로 곪고 있는 문제였다.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추가보고를 하였다. 마지막 네 번째 보고를 마치고나서 부서장은 기술자의 양심에 따라 방식공법을 변경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알려주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인사발령이 났다. 우리의 입장을 대변하던 부서장은 현장으로 좌천되었다. 들리는 말로는 관리자가 기술자의 시각과 똑같다는 것이었다. 나에게도 어떤 조치가 취해질 것으로 예상했었다. 거의 한 달 동안 받은 스트레스로 심신이 몹시 지친 상태였기에 사직서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윗사람의 뜻에 영합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지 피부로 절감했다. 다행히 더 이상의 추궁은 없었다. 세월이 흐른 후 나중에 턴키방식으로 진행된 경인아라뱃길 사업에서 제안된 방식공법은 모두 연식도장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때 위에 있던 그 분은 퇴임 후 그 회사의 회장으로 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가슴에는 불길이 순간 솟아올랐지만 머리에는 차가운 비가 내렸고 기억에서 내려놓아야만 했었다.
나는 그 때 자기의 처지에 대한 고려 없이 끝까지 기술자의 견해를 믿고 위에 직언해준 부서장의 용기에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나 역시 수공에 있으면서 그런 마음을 가지도록 한 사건이었다. 기술적인 공법의 선택은 이해관계나 권력자의 뜻에 영합이나 타협의 대상이 아닐 것이다.
경인운하에서 경인아라뱃길로 옷을 갈아입다
경인아라뱃길사업은 길이 19km, 폭80m의 수로. 접근수로, 국제항만인 부두시설, 박지, 마리나, 배후단지와 물류단지. 갑문건설, 레져공간, 친수도로 등 다양한 공종을 가진 건설 사업이었다. 사업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6개의 공구와 2개의 물류단지 사업으로 나누어졌다. 수도권 쓰레기매립지와 수도권의 그린벨트 지역이 포함되어 있고 뱃길사업으로 처음으로 하는 사업이다 보니 무릇 144여 개의 관계기관 및 부처협의, 중앙도시계획심의, 중앙하천심의 등 각종 협의 및 심의절차를 거쳐야 했다, 6개 공구의 설계와 설계적격 심의까지 일 년 이내에 마쳐야 했기에 토요일, 일요일은 물론 빨간 날은 거의 우리들의 몫이 아니었다. 동료들의 열정과 시운時運의 조화로 주어진 기간 내에 착공까지의 거의 모든 행정절차를 겨우 완료할 수 있었다. 나중 착공되고 나서 아래뱃길의 회식구호는 국토부 국장이 제안한 것이었다. ‘아라를 알아’하면 따라서 ‘아라 아라‘였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알아, 알아’였다. 이 구호 속에 말 못할 힘든 속내가 저마다의 가슴속에 깊숙이 담겨있지 싶었다.
경인아라뱃길은 수로공사와 항만공사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착공 후 이 사업의 성패는 속도와 안전의 조화에 달려 있었다. 처음 이 사업의 설계공기는 약 4년이었다. 줄이고 줄여서 겨우 22개월로 맞추었다. 인천과 김포의 접근수로, 박지, 터미널, 갑문, 부두, 배후단지와 물류단지를 맡게 된 경인항건설단 직원들한테는 주말과 공휴일도 거의 없었고 정해진 근무시간이 없었다. 아무리 급해도 한 건의 안전사고라도 나면 공기에 치명적이기에 안전이 최우선의 가치였다. 외부에서 안전점검을 나오는 사람들이 현장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안전의식을 함께 공유하는 현장이라는 소문이 밖에까지 퍼져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의 정성과 노력에 하늘도 감응한 탓인지 운이 좋아 끝날 때까지 한 건의 안전사고도 없었다. 사업 막바지에 어느 분이 국토부 등 많은 부서는 정해진 공기를 맞출 수가 없다고 하는데 수공만 가능하다고 한다 하면서 현장에 있는 당신이 솔직하게 진실을 말해달라고 하였다. 비록 우리 동지들은 경험은 없었지만 열정과 단합된 의지로 경인항 개항의 약속을 지킬 수가 있었던 것 같다.
수도권의 관문에 있는 현장이고 논란이 많은 사업이다 보니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많이 현장을 방문했다. 어느 날 토목학회 원로자문단이 현장을 방문하여 안내를 하였는데 원로 한 분이 나에게 출신대학을 물어보았다. 정중한 거절에도 계속 묻길래 지방 대학을 나왔다고 알려주니 그 사람의 얼굴에서 묘한 안색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우리공사 CEO는 현장에 와서 질책 한 번 없이 늘 고개만 끄덕였다. 덕분에 현장에 있는 우리는 오로지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현장을 맡긴 다음 위임하고 끝까지 믿어주고 격려해준 그 분에게 감사를 드린다.
근무경력을 돌이켜보니 현장과 본사가 대략 반반 정도 되는 것 같다. 관리단과 건설단, 관리부서와 사업부서도 경험해 보았다. 수공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조시·설계·건설·운영·관리까지 이어진다. 한 사람이 프로젝트 전체를 수행할 수는 없다. 게다가 수공의 프로젝트는 대부분 하천·상하수도·건축·환경·조경·기계·전기·전자통신·토지보상·민원 등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이기에 폭넓은 지식에 전문적인 지식까지 필요하다. 근무경험이 쌓이다 보면 자칫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아는 것은 많은 것 같은데 말로만 아는 기술자에 머무르게 될 우려가 다분하다. 한 명의 기술자가 자기 분야의 깊고 통찰력 있는 전문가(스페셜제너리스트)로 되는 길은 참으로 어렵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업무의 시스템에서 비롯되고 있는 한계일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에게 일은 무엇일까.
일을 위해서 수공을 택한 것은 아니지만 수공에서의 일은 나를 성장시켜 주었다. 이제 모든 일로써 맺어진 인연을 내려놓고 인생 일모작의 수확을 해야 한다. 튼실한 낱알도 있을 것이고 쭉정이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쭉정이로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일을 통해 나의 내면이 단단하게 된 것은 뜻밖의 결실이다.
잠시 눈을 감고 자문해본다. 나는 받은 월급만큼이나 일을 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일의 성과는 열정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열정을 쏟을 수 있다면 성과에 따른 보상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열정은 조직에서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조해야 하는 것임을 나의 기억의 창고에 새기면서, 가슴에서 머리로 흘러가는 강물과의 여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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