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 리스트에 하나를 넣다
벌써 가을이 성큼 내려앉았다. 나뭇잎만큼 많아진 생각들이 사소한 바람에도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처럼 나의 가슴 안으로 내려앉는다. 낙엽의 찰나, 무상과 생성의 간극을 진하게 느낄수록 어머니 대지에 한 발짝 다가가고 있음을 느낀다. 서리가 내리면 겨울이 다가옴을 아는 것처럼 나의 인생에도 찬바람이 불어온다. 육십갑자를 돌아서 처음 온 데로 되돌아가는 길의 여정에서는, 지나온 길에서 놓쳤던 나무와 바람의 미묘한 속삭임, 바다와 강의 은밀한 내음, 사람 사는 냄새와 문명의 고즈넉한 흔적을 느끼고 싶다.
인생살이 처음 시작할 때 무슨 목적이 있었겠는가. 이렇게 살고 그렇게 떠나겠다는 선언문 같은 것을 작성한 적도 없었다. 그냥 살아가고 있으니 살아간다고 여겨왔다. 인생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신비를 담고 있다, 무심한 세월처럼 그저 내 소유라고 붙잡아두지 않으면 되는데, 가슴과 머리 사이의 빈틈으로 욕망의 파도가 묘하게 밀고 들어온다.
심신의 욕구가 점점 적어지는 나이에 무슨 욕심으로 하고 말 것이 있겠는가. 더더욱 하지 못해 미련으로 남아 서운할 게 있을까. 이 몸이란 옷을 벗기까지 생각하다가 마침내 한 생각이 끝나면 처음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그곳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인생은 재미와 걱정, 보람과 덧없음, 고독과 자유가 늘 부딪히는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는 곡예와 같다. 돌이켜보면 삶은 관계 맺기 놀이였다. 가을은 관계에서 벗어나 내 속에 깊이 가라앉은 고독을 불러내 친구하기 좋은 계절이다.
불혹, 지천명의 나이를 넘어서 이순耳順에 이르렀는데도 삶은 더 오리무중이다. 물속에 있는 고기가 죽을 때까지 물을 모르는 채 살아가듯이 삶 속에서 삶은 영원히 모를 수밖에 없다. 이젠 타인이 던지는 말의 구속에서 조금은 자유로운 나이가 되었다. 삶의 뒤안길에서 힘든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한 마음이 단풍처럼 빨갛게 물들지 않고, 부산한 관계를 벗어날 때 찾아오는 고독의 무게에 눌리지 않게 되었다. 아마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이는 자신의 내면에서 낙엽을 보는 사람일 듯싶다.
세상사에 묻혀 잊고 지냈던 문제가 살아나고 있었다. 매일 입는 옷차림이 달라졌고, 익숙하게 알던 사람들의 시선에도 온도 차이가 있음을 느꼈다. 전화를 받거나 전화를 거는 일도, 하루 중 시간을 구성하는 내용도 많이 달라졌다. 대신 책과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만들어 낸 세상과 친숙해졌다. 책을 보기 위해 눈의 크기는 점점 작아졌고, 하늘보다 땅을 바라보는 횟수는 많아졌다. 어느 날 타인의 관점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닌, 스스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일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먼저하고 뒤에 할 것인지보다는 시간의 종착역에서 하지 않으면 후회할 일을 찾아보았다. 가장 자기다운 시도이기에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주위에서 한심하다고 비웃어도, 난 괜찮아 하면서 할 수 있으면 그뿐인 일이었다.
어떤 자취를 보면서 찾아 나설까. 도처에서 켜지는 문명의 밝은 불빛은 내면의 여백조차 꿈꿀 수 없게 사유가 침잠되지 않는 욕망의 세상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나는 문명의 길을 따라 그냥 앞으로 나가기보다는 수많은 선인들의 사유가 숨 쉬고 있는 희미한 미래로 걸어가고 싶었다. 어쩌면 인생의 겨울로 가는 여행길에서 즐거운 동반자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렘까지, 덤으로 얻을 것 같은 희망을 꿈꾸었다.
내 속에 잠재되어 있는 욕망이 무엇인지 꺼내고 보니 시간의 덧없음을 넘어선 참 나를 찾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무수한 사람들이 이 땅의 고유의 정서에 불교, 유교, 도교 등의 씨앗을 뿌려놓아 사유의 밭은 기름졌다. 그곳에는 가없는 사람들의 생각과 저마다의 세계가 스며들어 있었다. 그것의 바탕을 이루는 근원을 찾아 되새김질하면서 걷는 것도 좋은 여행이 되리라.
젊은 날 진주의 책방에서 마주친 서양인이 하필 남명 선생을 아느냐 하는 질문을 던졌다. 외국인도 아는 이름을 모르고 있다는 계면쩍음이 동양고전에 대한 실낱같은 관심으로 쭉 이어지게 했다. 군대에서는 고참의 손에 이끌려 신앙의 문턱까지 안내되었지만 믿음에 이르는 전도의 보검이 너무 예리하고 차가움을 느꼈다. 나를 낳아 준 부모에, 또 그 위의 부모들은 어디에 계시느냐 하는 나의 단순한 질문은 인연을 끝내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내가 알 수 있는 누군가가 있고, 나를 아는 누군가가 있다는 회의감도 한몫 거들었다.
앎과 기억해 내는 것의 차이를 반추해 보았다. 글이나 말로는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표현할 수 있지만 대부분 그것은 기억되어 있는 정보의 배열에 불과하다. 욕을 하면 나쁘다는 것을 아는데도 운전하면서 불쑥 욕이 나오는 순간이 있다. 어쩌다 나오는 말이 아니라 욕이 나쁘다는 앎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휘황찬란한 세상사에 휩쓸려 있다 보니 안다는 것의 미명아래 내가 나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옛날 농부처럼 계절의 조화에 순응하며 소박하게 살고 싶었다.
동양고전의 하나이면서 앎이라는 문제를 철저히 파헤쳐 몸을 닦는 체계를 수립한 대학에서는 앎의 단계로 성의―정심―격물―치지를 거쳐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말한다. 앎과 행동의 관계는 오랜 세월 동안 사유의 흐름에서 큰 논쟁거리의 하나였고,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살아있는 문제다.
매 순간 더불어 사는 삶 속에서 사람마다 일으키는 생각은 늘 부딪히면서 현실을 이루어 나간다. 인간이 만드는 인문人文의 세계는 글자 그대로 꾸미는 세상이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한 가상의 인문세계는 참으로 기막힌 세상일 것이다. 인간관계는 그 마구잡이 생각들을 붙잡아 감춰두고 겉모습으로 위장하면서 거래하는 세상이다. 습관처럼 부유하는 내 생각을 바꾸어 보고 싶었다. 대인은 표변豹變이요 소인은 혁면革面이라는 말이 있다. 군자는 겨울을 맞아 범이 털을 바꾸듯 남들이 쳐다볼 정도로 크게 변하는데, 소인은 얼굴빛만 살짝 바꾼다는 비유다. 지나온 나이테를 되돌아보니 그동안 대인까지의 거리는 너무도 멀었고, 늘 소인에 가까웠음을 실감하였다.
사경공부의 길에 들어서다
숨 막힐 정도로 빠른 속도의 시대에 마음을 편안히 놓아두기가 어렵다. 갑갑하거나 까닭모를 허전함이 속에서 올라올 때 가끔 들르는 서점이 있다. 서가에 진열되어 있는 저 많은 책들은 누구와 인연을 맺어 읽혀질 것인지 늘 궁금했다. 친구란 힘들 때나 기쁠 때 함께 있는 녀석이다. 그런 점에서 책은 진정한 도반이다. 몇백 번을 읽어도 질리지 않고 여전히 생기를 품고 있는 책이 있다. 굳이 이름을 붙이면 고전이라 한다. 그중 동양고전은 오랜 세월, 삶의 풍파를 함께 해온 탓인지 삶의 소소한 변화에 휩쓸리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의 빛을 간직하고 있다. 지혜의 빛을 내 안으로 불러들여 내 중심으로 살아가고, 내 몫만큼 살아내고, 내면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뚜벅뚜벅 걸어가고 싶었다.
동양고전 중에서 사서와 주역, 노자, 금강경이 눈에 들어왔다. 사서공부는 경문에 주자가 해석한 사서집주를, 주역공부는 정자와 주자의 주석서인 주역전의를, 노자공부는 유불선의 관점에서 읽어보고 싶었다. 기술에도 원천기술이 중요하듯이 공부는 먼저 나만의 원천자료를 만들어야 한다. 컴퓨터를 이용하여 사경작업을 해보기로 하였다. 먼저 한자를 읽은 후 한글로 입력하고, 이를 하나하나 한자로 변환시키는 과정이었다. 생소한 일이기에 몇 년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어 막막하기만 했다.
『대학집주』는 경1장과 전10장으로 구성된 비교적 얇은 책이다. 주자가 죽기 직전까지 수정에 수정을 할 정도로 고심한 책이다. 자기를 밝혀 세상을 이끌어갈 리더가 읽어야 할 책이다. 『중용집주』는 3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학의 심법을 밝힌 책이라 한다. 대학이나 중용은 글자 수가 많지 않아 비교적 수월하게 사경을 끝낼 수 있었다. 원문을 읽고 입력하면서 두 책이 가진 함의가 평범하지 않음을 느꼈다. 쉽게 읽힌다고 쉬운 책이 아니었다. 파고 들어갈 사유의 퇴적층은 깊고 넓었다.
논어집주는 얼핏 보면 단편적이지만 생소한 한자가 꽤 많은 편이다. 학이편부터 시작해서 요왈편까지 2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문을 읽고, 해석하고, 입력하기까지 일 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거듭해서 읽을수록 깊이와 넓이가 느껴졌다. 때론 우리에게 익숙한 공자가 아닌 공자의 민낯을 마주하는 불편함도 있었지만, 삶을 헤쳐갈 수 있는 긍정과 지혜의 우물을 퍼낼 수 있을 것 같은 묘한 매력이 있었다.
『맹자집주』는 총 7편 14장으로 논어보다 양이 더 많다. 모르는 한자가 많았지만 읽을수록 문장이 깔끔하고 생동감이 있었다. 간혹 어려운 한자가 나와서 읽어내는 일이 힘들었지만 가슴을 적시는 주옥같은 어귀들이 많고 맹자의 기상까지 느껴져 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주역전의』는 『논어집주』와 『맹자집주』를 합친 양과 거의 같다. 은유가 많고, 시대가 먼 괴리감에다가 어려운 한자까지 많아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성취는 인내와 치열함의 산물임을 경험으로 안다. 육십사괘 중 하나의 괘를 입력시키는 데 삼일 정도 걸렸다. 육십사괘를 모두 끝내고 나서 주역의 날개인 십익전과 주자의 역설강령 등도 입력하였다. 거의 2년 이상 걸렸던 것 같았다. 주역공부는 진흙구덩이와 같아서 한 번 들어가면 빠져 나가겠다고 몸부림칠수록 잡아 가두는 오묘한 매력이 있다. 그 곳에 물을 채워 연꽃 한 송이를 피우고 싶은 욕망이 든다.
『노자(도덕경)』는 총 8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석가마다 관점이 다르므로 통행본과 왕필의 주석, 도교계통의 용연자淵子의 총설, 주역적 관점으로 풀이한 보만재의 도덕지귀, 감산선사의 주해를 함께 입력하였다. 노자는 이름만큼이나 기묘한 책이라 판본도 제각각 조금씩 차이가 났다. 운문형식으로 은유와 상징이 많아 이해가 어려웠다. 읽어도 ‘책은 책, 나는 나’였다. 노자라는 책은 심산의 깊은 곳에 묻혀있다고 전해지고 있는 보물과도 같았다.
종착점에 도달했다. 가볍게 시작했던 공부가 차츰 목적이 되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경문은 글자가 커서 비교적 알아보기 쉬웠지만 집주는 글자가 작아서 보기가 쉽지 않았다. 작은 글씨를 읽고 입력하다 보면 눈은 뻑뻑하고 침침하였다. 손가락 관절까지 아프면서 온몸이 뒤틀렸다. 처음 시작할 때는 한자를 옥편으로 찾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스마트폰 앱을 활용하니 효율이 높아졌다. 참 공부하기 좋은 세상에 태어났음에 고마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사경을 끝냈다고 무엇이 달라졌을까. 사경은 사경이었다. 사경하는 데에 정신을 쏟다 보니 뜻을 살피고 넘어가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 그냥 옮기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제부턴 마음의 눈으로 읽어보고 분석해서 앎을 체화하는 경지로 나아가고 싶다.
돌이켜보니 사경공부는 결국 나란 존재가 무엇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를 묻는 것이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물리적 현상에 대한 의문점과 신비는 서서히 풀려가고 있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몇 천년의 오래된 사유의 퇴적층이 그 물음에 무슨 답을 줄 수 있을까. 시대가 변해도 사람들의 심리는 비슷하기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된다. 사경을 하는 과정에서 주역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自天祐之’라는 말이 가슴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왔다. 자신을 믿고 나날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일상에서 담담하게 산다는 게 심신 양 측면에서 많은 노력을 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임을 알게 된 것은 공부하는 과정에서 걷어 올린 뜻밖의 수확이었다.
어떤 때는 읽고, 찾고, 사경하는 노력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았다. 차라리 눈, 귀, 입이나 즐겁게 할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많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소용돌이를 일으켜 방해를 했지만 오히려 어렵기 때문에 더 해 보고 싶은 의지가 일어났다. 인생은 역시 순간순간 부딪히는 심리로 연결되어 있다. 매 순간 흔들리는 세상살이에서 마음을 비쳐주고 지켜가게 해주는 대상이 있다는 그 자체가 삶에 활력이 될 수 있음을 실감했다.
버킷에 처음으로 목록을 하나 등록하는 순간, 허망하거나 뿌듯한 마음은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해야 될 일을 조금 했을 뿐, 해야 될 일이 더 많이 남았음을 알았다. 다음 버킷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이 하나로도 좋지만 비워지지 않는 마음은 뭔가를 또 찾아서 헤맬지도 모른다. 그게 무엇이든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편이 마음을 가볍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벌써 10월의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나무는 나뭇잎조차 붙잡아 둘 수 없다. 잎들은 때가 되니 미련 없이 떨어져 가버린다. 훌훌 흩어져 가버린 나뭇잎이 언젠가 이름 모를 나무의 거름이 되어 다시 태어나는 운명처럼 나의 버킷 리스트도 그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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